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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열흘 밤의 꿈> 100년의 수수께끼


<열흘 밤의 꿈> 100년의 수수께끼


Japan; 2007; 111min; 35mm; Color
Director: Kon Ichigawa 외 10명
Cast: Kenichi Matsuyama 외 다수

 
영국의 세익스피어, 중국의 루신, 러시아의 톨스토이... 무릇 국가는 그 나라 '문학의 자존감'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표작가'들을 가진다. 그들의 작품은 민족의 감성을 대변하고, 국가의 역사를 관통한다. 우리가 중국과 중국인에 대해 알기 위해 두꺼운 역사서와 함께 루신의 작품들을 읽는 이유이다. 하지만 이들은 비단 한 국가의 소유는 아니다. 영국의 비평가 토머스 칼라일은 '세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고 했지만, 세익스피어의 작품들은 이미 인류 공통의 재산이다. 이렇게 이들의 이름이 한정된 국가의 영역을 넘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작품 속에 인류에 대한 '보편적 철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대와 공간, 민족을 뛰어 넘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다. 일본을 본다면 누구를 생각할 수 있을까? 단연 '나쓰메 소세키'다. 근대와 전근대, 문명과 반문명, 동양과 서양, 개인과 사회에 대한 고민을 치열하게 글로 풀어쓴 그는 일본 화폐 도안 속 인물로 선정될 정도로 일본인들의 전폭적인 애정을 받는 인물이다. 1867년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기 1년 전에 태어나 메이지 천황이 죽은 뒤 4년이 지난 1916년 눈을 감은 그는 말 그래도 일본의 '근대'를 온몸으로 살았다. 50년이 조금 넘는 생애 동안 완성한 12편의 장편과 30편이 조금 넘는 중단편 소설들은 그가 일본 근대문학을 '전면'에서 이끌고 나갔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은 일본을 넘어 아직까지도 전 세계 곳곳에서 읽히고 있다.

하지만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서 느껴지듯 그의 일생은 지금 그에게 주어진 명성만큼 화려하지만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어린시절부터 이어지는 불안한 가정환경(입양, 양자, 징병기피, 유산, 아내의 자살시도)과 영국 유학시절부터 시작된 신경쇠약증세는 끊임없이 그를 괴롭혔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반대로 철저히 자신을 바닥으로 몰고가는 상황들이 소세키 자신이 글을 쓸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가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한 것도 신경쇠약의 치료 목적이었다고 한다.) 때문인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 모든 충돌하는 가치들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그의 작품들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마음>, <도련님> 등의 비교적 잘 알려진 그의 장편들을 포함해 몇 해 전 출판된 전집의 작품들은 근대화 시기에 동양인으로서, 일본인으로서, 그리고 개인으로서 소세키의 경험과 감상이 맞물리면서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오묘한 느낌을 주는 텍스트들이다. 그래서일까? 한 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익숙하다는 느낌보다도 새롭다는 생각이 반복적으로 든다. 여전히 사람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여러가지 새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한다. 아마도 이 새로움이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이 가진 힘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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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그 중에서도 으뜸은 단연 1908년 발표한 <몽십야>라고 생각한다. '난 이런 꿈을 꾸었다.'로 시작되는 10개의 꿈으로 이루어진 이 짧은 소설은 작가가 일본의 근대화에 대해 느끼는 불안과 한계, 나쓰메 소세키를 끝까지 괴롭게 만들었던 트라우마 등이 집약적으로 응축된 작품이다. '꿈'을 소재로 하고 있기에 상당히 상징적이고 은유적이지만, 작가의 내면을 읽기에 가장 좋은 텍스트들이다. 곧 이 10개의 꿈이 곧 나쓰메 소세키와 그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평일 오후 한 멀티플렉스의 예술영화전용관을 찾았다. 다른 상영관에서 뚝 떨어져 오도카니 자리잡은 성냥갑같이 생긴 상영관에서 오랜만에 신나게 영화를 봤다. 극장 안에 나 혼자밖에 없었으니까...(혼자 영화를 본 건 2006년 <돈 컴 노킹>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손에 쥔 티켓은 2007년도 일본 영화 <열흘 밤의 꿈>... 앞에서 길게 설명한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를 영화로 옮긴 작품이다. 1908년에 <몽십야>가 세상에 나왔으니 2007년은 꼭 100년을 맞은 해였다. 100살이 된 이 거장의 마르지 않는 샘과 같은 이야기를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을 터. <데쓰노트>의 제작진들은 일본의 내로라하는 감독, 배우들과 함께 나쓰메 소세키의 <몽십야>를 위한 특별하면서도 의미있는 작업을 했다. 얼마 전 타계한 <버마의 하프>, <이누가미 일족>의 거장 이치가와 곤부터 <주온>, <그루지> 시리즈의 시미즈 다카시, <린다 린다 린다>,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의 야마시타 노부히로, <유레루>의 니시키와 미와, <콰이어트 룸에서 만나요>의 마츠오 스즈키 등을 포함한 11명의 감독이 각각 한 개씩의 꿈이야기을 맡아 영화로 옮겼다. 그리고 마츠야마 켄이치, 토다 에리카, 코이즈미 쿄고 등의 배우들이 함께 했다. 10분 내외로 완성된 영화들을 모아 탄생한 옴니버스 영화가 <열흘 밤의 꿈>이다. 과연 100년이 지나고 지금의 일본인들은 소세키의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이야기를 어떻게 풀었을까?

10개의 작품 모두 색다른 느낌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원작의 상징과 의미보다도 '현재의 감각'에 충실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다시 말해 11명 감독이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열 개의 꿈을 각자의 영화적 색깔에 맞춰 새롭게 옷을 입혔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나쓰메 소세키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자 했던 바를 정확히 스크린으로 옮긴 것은 아닐 수 있다. 프로이트를 굳이 거론하지 않아도 소세키의 무의식과 내면을 드러냈던 텍스트를 그대로 옮긴 작품도 몇몇 있지만, 대개는 나름의 새로운 '살'을 입혔고, 다른 일부는 아예 다른 이야기로 재해석 된 것도 있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을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원작에 충실한 영화화를 기대했다면 아쉬울 수도 있지만 영화로 새롭게 탄생한 <열흘 밤의 꿈>은 소설이 아니라 그야말로 '영화'였다. 10분 내외의 짧은 시간동안 11명의 감독들은 소세키의 '꿈'을 가지고 영화적으로, 장르적으로 충분히 가지고 논다.(즐긴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편차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편한 마음으로 즐기기에 무리가 없다. 원작이 주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걷어내고 전체적으로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었으며, 감독들의 색깔이 잘 드러내도록 장르적으로 탈바꿈됐다. 소세키한테는 미안한 말일수도 있지만 '정답'에 관계없이 11명의 감독들이 '가지고 논' 영화 자체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원작과 비교해 영화가 가지는 가장 큰 차이점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갖는다는 점이다. 영화를 열고 닫는 역할을 하면서, 동시에 10개의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소세키로 연상되는 작가와 한 여인이 최근 작가가 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열흘 밤의 꿈>이라는 수수께끼... 작가는 담담히 그 수수께끼가 100년 정도 지나면 풀릴 수 있을 거라한다. 그리고 100년 후, 11명의 영화감독이 수수께끼에 도전을 했다. 과연 정답일까? 프롤로그의 여인은 에필로그에 100년이 지난 일본에 다시 등장한다. "이제 끝난 것일까? 아니면 또 다시 100년을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자신의 작품이 100대를 이어 읽히기를 희망한다고 말한 소세키를 기억한다면 그 수수께끼가 지금 쉽게 풀릴 것 같지는 않다. 답이 있는지로 모르겠지만 말이다.

10가지 수수께끼 이야기를 풀기 위해 첫 번째 밤은 <란포지옥>의 짓소지 아키오, 두 번째 밤은 <버마의 하프>의 이치가와 곤, 세 번째 밤은 <주온>의 시미즈 타가시, 네 번째 밤은 <원피스 3기 극장판>의 시미즈 아츠시, 다서 번째 밤은 <무서운 여자>의 토요시마 케이스케, 여섯 번째 밤은 <콰이어트 룸에서 만나요>의 마츠오 스즈키, 일곱 번째 밤은 <파이널 판타지>의 아미노 요시타가와 카와하라 시메이, 여덟 번째 밤은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의 야마시타 노부히로, 아홉 번째 밤은 <유레루>의 니시키와 미와, 그리고 마지막 열 번째 밤은 <지옥갑자원>의 야마구치 유다이가 각각 맡았다. 각 에피소드들은 앞에 이야기한 것처럼 감독의 색깔과 장르적 특성이 잘 배어 있다.

가장 눈이 띄는 작품은 총 제작 지휘를 맡았던 일본의 거장 이치가와 곤이 맡은 '두 번째 밤'의 이야기이다. 그가 2008년 2월 생을 마감했으니 실질적으로 연출을 맡은 마지막 작품인 셈이다. 영화는 사무라이로 보이는 한 남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이 남자는 자신을 무시하며 깨달음을 강요하는 스님에게 꼭 복수하고자 다시 시계종이 울릴 때까지 '無'가 무엇인지 알고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방석 밑의 단도로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자결을 하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 순간 다시 스님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에게 '깨달음은 너에게 있다.'는 말을 남긴다. 이야기의 마지막은 원작과 다르다. 원작에서는 시계종이 울리고 남자가 칼집을 잡으면서 끝이 나지만 이치가와 곤은 깨달음에도, 죽음에도 실패한 남자에게 마지막 구원과 희망을 전하는 듯한 내용으로 마무리를 하고 있다. 원작을 좁게 해석한 여지는 있지만 이 에피소드가 시선을 잡는 이유는 초창기 영화를 연상시키는 무성의 흑백화면을 이용한 영상 때문이다. 화면과 공감각을 활용한 이 작품은 <열흘 밤의 꿈>이 소설이 아니라 영화라는 사실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성흑백이지만 영화 속에는 두 번의 예외가 등장한다. 시계 종소리는 무성영화에서 벗어나고, 붉은 빛의 칼자루는 흑백영화를 벗어난다. 감독은 이런 청각적, 시각적 장치들을 활용해서 영화적 분위기를 환기시킴과 동시에 남자의 감정을 간결하게 보여주고 있다. 배우들의 과장된 표정, 무성과 흑백화면이 옛스럽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군더더기를 말끔히 배제한 미니멀적인 화면과 간단한 숏처리는 과연 졸수가 가까운 노장이 만들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감각적이다.


세 번째 밤을 연출한 시미즈 타카시 역시 원작의 상징들을 재해석해 긴장감 있는 화면을 연출한다. 원작의 이야기는 불안정했던 어린시절, 아이의 유산과 아내의 자살시도를 경험한 나쓰메 소세키의 '아이에 대한 불안' 등 상당히 복잡한 상징들로 채워진 텍스트이다. 영화는 원작에 비교적 충실해서 에피소드를 구성했다. 물론 공포영화의 거장답게 중간중간 숨을 조이게 만드는 장면들 역시 빼놓지 않고 있다. 원작은 아빠가 눈 먼 아이를 버리기 위해 업고 가던 중 자신의 과거를 알게 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그리고 있지만, 더불어 영화는 소세키에 대해 알려진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면서 설명력을 높이고 있다. 즉, 그의 어린시절, 결혼생활 등을 짧은 시간 동안 전체적으로 살피면서 소세키가 아이에 대해 느끼는 불안한 감정의 근원을 확인하는 것이다. 공포의 근원을 밝히는 것... 이는 시미즈 타카시 감독이 구사하는 공포 영화의 장르적 구성에 비교적 충실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유레루>를 통해 인물의 감정변화를 치밀하게 추적했던 니시카와 미와 역시 '아홉 번째 밤'의 이야기를 여인의 감정의 흐름을 따라 그려내고 있다. 아홉번 째 꿈은 열 편의 이야기 중에서 다섯 번째 꿈과 함께 유일하게 여성이 화자가 되는 에피소드이다. 훗카이도로 주소지를 옮겨가면서까지 징병을 기피했다고 알려진 소세키는 징병에 대해 상당한 불안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상당히 불편했을 것이고, 여성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시켰을 거라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이 에피소드의 감독 역시 여성이다.) 아내는 군에 입대한 남편의 무사를 위해 신사에서 기도를 하고 있다. 원작에서 아내는 남편이 죽은 후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으로 남편에 대한 사랑을 전하는 인물이다. 히지만 영화에서는 그런 아내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국가를 위해 떠나는 남편에게 개인적인 이유로 징병에 적극 반대하는 여성이다. 니시카와 미와 감독은 전혀 갈등이 없는 것처럼 보였던 부분에서 갈등을 표현함으로써 당시 감춰져 있었던 여성의 복잡한 내면을 끌어낸다.  

이 밖에도 <파이널 판타지>의 비주얼 디렉터인 아미노 요시타카와 카와하라 시메이가 애니매이션으로 연출한 일곱 번째 밤 역시 원작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근대 문명 속에서의 개인의 무력한 존재감을 몽환적으로 그려냈고, <지옥갑자원>을 만든 야마구치 유다이 역시 그답게 가장 '창조적인' 재해석으로 마지막 열 번째 밤을 유쾌하게 장식했다. 또한 마츠오 스즈키가 연출한 여섯 번째 밤은 전통적인 이미지와 스토리에 현대적인 테크노 풍의 춤과 노래를 결합시키면서 가장 흥미진진하고 신나는 화면을 선보인다. 하지만 가장 기대를 했었던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여덟 번째 밤은 도무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것들도 채워져 실망스러웠고, 첫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밤의 꿈이야기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P.S. 최근 들어 옴니버스 영화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사랑해,OO>으로 이어지는 도시 시리즈도 있고, 칸 영화제 60주년을 기념해 만든 <그들 각자의 영화관>이나 한 감독이 어려가지 이야기를 이어놓은 <커피와 담배>와 같은 독특한 컨셉의 영화들도 있다. <열흘 밤의 꿈>도 결과를 떠나서 만들어지는 과정 자체에 의미를 둘 수 있는 기획인 것 같다. 100년이 된 거장의 작품을 영화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작품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어쩐지 부럽기만 하다. 모두 함께 추억하고 기념할 만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올해는 25개의 이야기가 엮인 소세키의 <영일소품>이 나온지 100년인데, 또 한 번 일을 벌렸으면 좋겠다. 우리도 임권택 감독부터 나홍진 감독이 한 편씩 책임을 진 '야심찬' 옴니버스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