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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2009 디자인 영화제] 디자인, 브랜드, 로고, 그리고 헬베티카


7월 23일부터 29일까지 미로 스페이스에서 열린 디자인 영화제(Design Film Festival)의 두 상영작 <헬베티카 Helvetica>와 <오브젝티파이드 Objectified>를 보고 왔다. 평일에도 매진을 거듭하면서 인기리에 상영 중인 이 두 다큐멘터리는 아마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서 전혀 상반된 두 가지 반응을 이끌어낼 것이다. 평소에 글씨체라든가 디자인이라든가 하는 쪽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 본다면, 지루하기 그지없는 다큐멘터리일 것이고, 디자인을 전공했다든가, 디자인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본다면 꽤나 흥미로운 내용들로 채워진 위트 넘치는 기록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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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디자인이라는 한정된 분야의 다큐멘터리를 영화관에서 볼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디자인 관련 종사자들에게는 소중한 기회일 것이고, 일반인들에게는 문화 다양성 측면에서 즐거운 일이다. 두 영화를 보는 중간 중간에 가끔씩 내가 영화를 보고 있는 건지 강의를 듣고 있는 건지 조금 헷갈릴 정도로 해당 분야에 깊게 파고든 이야기들이 나오기도 했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디자인과 브랜드를 소재로 한 이야기는 결국 우리 일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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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브젝티파이드>는 의자 디자인에서 시작하여 핸드폰, 컴퓨터, 오디오, 과일 깎는 필러, 칫솔에 이르기까지 우리 생활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디자인의 철학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디자인 면에서 아름다운 제품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각적으로나 내용면에서나 상당히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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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품의 성능 못지 않게 디자인 자체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애플의 제품들, IKEA의 가격 혁명, MUJI 디자인의 실용성 등에 대한 이야기들은 평소에 디자인이나 브랜드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감독은, 디자인이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신상품의 구매를 현혹하는 소비지상주의의 산물임을 인정하고, 그에 대한 반성으로 재활용이 가능하거나 폐기물을 줄일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디자인계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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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좋은 디자인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주입된 결론이 아니라 관객 스스로 결론을 내려볼 수 있게 해 준다는 느낌이 들었다. 개인적으로는, 기능에 충실한 디자인이면서 군더더기가 없는 모던한 제품, 내구성 있고 시대를 초월해서 사용할 수 있는 클래식한 디자인이 합리적이면서도 미학적이지 않은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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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면, 돈많은 사람들을 위한 디자인이 아니라, 값싼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의 실용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디자인이 좀더 많아졌으면 한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급수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아프리카에서 무거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옮겨야 했던 사람들을 위해서 디자이너들이 고안한 hippo roller는 디자인을 통해서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선한 의도를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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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목이 서체(폰트 타입)의 이름인 <헬베티카>는 서체와 그래픽 디자인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다. 서체 하나로 80분짜리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지만, 헬베티카라는 서체가 (서구인들의) 일상 생활에 얼마나 많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수많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헬베티카 서체를 얼마나 편애하는지를 보고 나면, 50여 년의 역사를 지닌 이 서체가 모더니즘의 시기에 궁극의 서체가 된 과정을 알 수 있다. 뉴욕 지하철 안내문들의 서체이기도 한 헬베티카는 네덜란드, 독일의 거리에서 가장 익숙하게 보았던 서체이자, 기업 로고에 가장 많이 쓰이는 서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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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는 도대체 글씨체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는 생각이 들수도 있지만,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글씨체로 쓰느냐에 따라 텍스트의 느낌이 많이 달라질 수 있다는 걸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전에는 출판업자나 인쇄물을 디자인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던 "서체"가 이제는 컴퓨터의 존재로 인해 일반인들에게도 친숙한 도구가 된 것이다. 더구나 MS 윈도우즈가 어설프게 카피해서 만든 Arial 서체에 뭔가 불만을 느꼈던 사람이라면, 헬베티카 서체의 미학에 더욱 매력을 느끼게 된다. 영화 <헬베티카>는 "헬베티카" 서체에 대한 맹목적인 찬사가 아니라 헬베티카에 대한 반대 의견들도 함께 보여주는데, 글로벌 기업들의 CI에 많이 쓰인다는 이유로 세계화의 서체라고 한다든지, 베트남전을 지지하는 서체라고 부르는 것은 조금 오버가 아닌가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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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헬베티카>를 보고 나면, 길거리의 간판들과 각종 인쇄물들을 유심히 보게 되는데 의외로 우리나라의 거리 간판이나 인쇄물 중에는 헬베티카가 그리 많이 사용되는 것 같지 않다. 알파벳에 비해서 미학적 디자인이 쉽지 않은 "한글"을 주로 사용하다 보니까 텍스트 자체의 디자인에 대해서 관심을 크게 기울이지 않아서 그런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긴 어쩌면, 반자본주의 정서에서 본다면 디자인과 글씨체에 대한 이 모든 이야기가 공허하고 덧없는 사치와 허영으로 보여질 수 있는 면도 있다. 하지만 물건이든 글씨체든 무엇인가 선택해야 한다면 가능하면 아름다운 것을 선택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욕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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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바로 코앞에 있는 극장임에도 불구하고 요즘 바쁜 업무 때문에 영화제에 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영화를 보기로 결심한 데에는 게리 허스트윗 감독의 필모그래피가 큰 역할을 했다. Wilco 의 앨범 "Yankee Hotel Foxtrot" 의 작업 과정을 영화화했던 <I am Trying to Break Your Heart>을 보고 나직한 감동을 느꼈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밖에 밴드 "Death Cap for Cutie"의 다큐멘터리 제작도 했다고 하니... "나랑 음악 취향이 잘 맞는 감독이구나" 하는 동질감을 느끼고는 선뜻 영화제에 동참한 셈이다. 허스트윗 감독이 "디자인 다큐멘터리 3부작"의 세번째 작품을 현재 준비 중이라고 하니, 가능하면 DVD로라도 챙겨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