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조용한 혼돈] 삶을 되돌릴 수 없다는 깊은 성찰


조용한 혼돈 (Caos Calmo)
안토넬로 그리말디 감독, 2008년
 
섬세하고 따스한 드라마

가족들과 함께 별장으로 휴가를 온 피에트로는 동생과 함께 해변에서 운동을 하던 중, 물에 빠진 여인을 발견하고 그녀를 구해준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피에트로는 갑작스런 아내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예상치 못한 아내의 죽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을 짊어지게 된 피에트로는 눈물을 흘릴 여유마저 누리지 못한다. 그렇게 아내를 떠나보낸 피에트로는 하나뿐인 딸 클라우디아에게 다시는 상처를 안겨주지 않겠다며 딸의 곁에 항상 있겠다고 약속한다. 그날부터 피에트로는 딸의 학교 앞 공원에서 일상을 보내기 시작한다.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그 기구한 운명으로 인해 때로는 희망에 젖기도 하고 때로는 절망에 빠지기도 한다. 한 여자의 목숨을 구해준 날, 아내를 떠나보내야 했던 피에트로의 마음에도 삶과 죽음은 그렇게 깊은 상처를 새겨 넣는다. <조용한 혼돈>은 그런 피에트로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가는 과정을 섬세하고 따스하게 그려낸 드라마다.

아내의 죽음, 그리고 남겨진 딸을 위한 끝없는 부성애 등 <조용한 혼돈>은 신파에 어울릴법한 소재들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영화는 주인공의 슬픔을 통해 관객들의 마음을 울리는 데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영화는 주인공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파고들기보다 주인공이 겪는 일상의 모습을 통해 내면을 묘사하는데 방점을 찍는다. 그렇게 영화는 신파에 머물지 않고 삶에 대한 성찰까지 파고든다. 딸의 학교 앞 공원에서 보내는 일상 속에서 피에트로는 조금씩 고개를 돌려 자신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매일 공원을 지나가는 여러 사람들과 천천히 관계를 맺어가고, 또한 자신을 찾아온 이들로부터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피에트로는 조금씩 아내의 죽음이라는 상처에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을 배워간다. 물론 매워질 수 없는 마음속 상처의 그 끝없는 깊이로 인해 때로 피에트로는 슬픔을 견디지 못해 힘겨워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상처가 아물 듯, 피에트로 또한 자신의 상처를 이겨나간다.


한 명의 주인공이 영화의 모든 걸 이끌어가는 <조용한 혼돈>에서 무엇보다 가장 빛나는 것은 난니 모레티의 완숙한 연기다. 연출이라는 전공분야를 잠시 뒤로 하고 연기에 매진한 난니 모레티는 우수에 가득 찬 표정으로 피에트로가 지닌 마음속 조용한 혼돈을 표현해내며 영화를 안정적으로 이끈다. 또한 안토넬로 그리말디 감독은 음악 마니아답게 라디오헤드와 루퍼스 웨인라이트 등 심혈을 기울여 선곡한 음악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해 피에트로의 감정을 적절하게 환기시킨다. 특히 라디오헤드의 ‘Pyramid Song’과 함께 피에트로가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영상과 음악을 통해 감정이 극대화되는 영화의 백미다.


“선생님이 그랬어요. 어떤 건 되돌릴 수 있지만 어떤 건 되돌릴 수 없다고요.” 학교에서 배운 회문(回文)을 설명하며 딸 클라우디아는 피에트로에게 말한다. 거꾸로 읽어도 같은 문장이 되는 회문처럼 삶 또한 그렇게 거꾸로 되돌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한 번 엎질러진 물은 다시 담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의 삶 또한 억지로 되돌릴 수 없다. 되돌릴 수 없다면 되돌려지지 않는 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피에트로는 다시 마음의 평정을 되찾는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극복한다. 피에트로가 다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순간 <조용한 혼돈>은 영화의 마침표를 찍는다. 한 사람의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쳤던 조용한 혼돈이 사그라질 때의 평안함을 통해 영화는 관객의 마음에도 작은 온기를 남긴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