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학교 가는 길] 전쟁의 폭력성에 익숙해진 아이들의 초상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학교 가는 길 (Buda Az Sharm Foru Rikht / Buddha Collapsed out of Shame)
하나 마흐말바프, 2007년


소녀는 학교에 가고 싶었다. 세상에서 가장 깨끗할 것 같은 눈을 가졌고, 앞니 하나가 빠진 모습마저도 귀여운, 아이다운 천진난만함을 간직한 소녀였다. 엄마는 집에서 갓난아기인 동생을 보라고 했지만, 소녀는 학교에 다니는 옆집 소년처럼 재밌는 이야기를 배우고 싶었다. 장난기 가득한 옆집 소년은 학교를 가려면 공책과 연필이 있어야한다고 말했다. 공책과 연필을 살 돈을 받기 위해 소녀는 엄마를 찾아 나서지만 엄마는 어딜 갔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소녀는 돈을 구하기 위해 혼자 시장으로 나섰다. 집에서 키우는 닭이 낳은, 새하얀 달걀 네 개를 손에 쥐고서 말이다.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동심의 세계를 그린, 순수함으로 가득한 영화’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의 조그만 마을 ‘바미안’을 배경으로, 학교가 너무 가고 싶은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담은 <학교 가는 길>에서도 그런 동심의 세계를 발견하려고 할 지 모른다. 조그마한 손으로 달걀 네 개를 살며시 쥔 채 떨어트리지 않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소녀의 모습을 보며, 아이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귀여움이 느껴져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을 것이다. 공책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갖은 노력을 다하는 소녀의 모습에서는 친구의 공책을 돌려주기 위한 한 소년의 이야기를 동화적으로 그린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학교 가는 길>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아이들의 순수함은 영화가 의도한 것이 아니다. 그건 단지 영화 속 아이들이 실제로 가지고 있는 순수한 모습이 그대로 반영된 것일 뿐이다. 오히려 <학교 가는 길>은 동심의 순수함을 그리는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왜냐면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아이들의 삶은 변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영화의 가장 놀라운 순간은 실제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통해서가 아니라, 전쟁놀이를 하는 소년들의 모습만으로 전쟁의 폭력성을 실감하게 만들 때이다. 가까스로 공책을 마련하여 학교로 가는 소녀는 우연히 몇몇의 소년들을 만나게 된다. 자신들을 탈레반이라고 부르면서 나뭇가지로 만든 총을 들고 전쟁놀이를 하고 있던 소년들은 소녀를 보자마자 마치 탈레반이 실제로 전쟁포로들을 처형하듯이 소녀를 구덩이에 넣고는 얼굴을 가린다. 이건 전쟁놀이가 아니다. 소년들은 진짜로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가면을 쓴 소녀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소년들은 나뭇가지 총을 들고는 차가운 표정으로 소녀를 쳐다본다. 심지어 몇몇 소년은 소녀를 처형하기 위한 돌까지 주워서 들고 온다. 구덩이 속에서 소녀는 장난일 것이라 믿지만, 소녀의 믿음과는 달리 소년들은 진짜로 돌을 던지려고 돌을 든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든다. 아이들에게서 동심의 순수함을 바랬다면 그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동심의 세계는 순수할 것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아니,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몰라도 소년들이 탈레반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은 그들이 순수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에 뭐든지 의심 없이 믿기 마련이다. 그래서 전쟁을 체험한 아이들에게 전쟁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닌, 그들의 눈으로 본 것의 재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감독인 하나 마흐말바프는 18살이라는 나이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직한 태도로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담아낸다. 그 어린 나이에도 이토록 리얼리즘에 충실한 연출을 하게 된 것은 어쩌면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영화에 담기 위해서는 그 어떤 왜곡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감독의 판단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한 감독은 영화를 통해 단지 아이들의 일상에 스며든 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그런 아이들에 대한 어른들의 무관심까지 관심을 갖고 나아간다. 영화의 초반, 엄마를 찾던 소녀가 높은 바위산에 오른 장면이 잠깐 등장한다. 조금만 발을 잘못 디디면 밑으로 떨어지는, 보기만 해도 아찔해 보이는 그 산에서 소녀는 애타게 엄마를 부른다. “엄마 어디 있어? 나 떨어질 것 같아요” 소녀는 추락의 위험에 서있지만 소녀를 붙잡아줄 어른은 어디에도 없다. 이후에도 영화 속에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는커녕 무관심한 태도로 일관한다. 전쟁의 폭력성에 익숙해진 아이들, 그리고 그런 아이들에게 무관심한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가 끝나더라도 영화 속에서 보아온 안타까운 현실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쉽사리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쉽지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학교 가는 길>의 원래 제목은 <불상은 수치심 때문에 붕괴되었다(Buddha Collapsed out of Shame)>이다(같은 제목으로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영화의 시작과 처음에 등장하는 거대한 불상의 폭파 장면은, 2001년 탈레반이 다른 국가 및 단체들의 비난에도 이슬람 근본주의를 앞세워 바미안의 오래된 유적인 불상을 파괴한 장면이다. 하나 마흐말바프는 이 제목을 아버지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칸다하르>를 만든 다음 쓴 글 「아프가니스탄의 불상은 파괴된 것이 아니다. 너무 치욕스런 나머지 무너져 내린 것이다」에서 가지고 왔다. 우리에게 아프가니스탄은 9·11 테러 이후 미국과의 전쟁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 이전부터도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온갖 수난을 겪고 있던 나라였다. 하지만 이런 비참한 현실에도 세상은 무관심했고, 불상이 파괴될 때에도 사람들은 파괴된 불상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 정작 그 시간에 가난으로 죽어가고 있던 아프가니스탄인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결국 아프가니스탄의 이런 안타까운 현실을 치욕스럽게 느낀 나머지 불상이 붕괴된 것이라고 모흐센 마흐말바프는 말한다. <불상은 수치심 때문에 붕괴되었다>는 제목과 함께 이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상의 파괴 장면은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려는 감독의 태도를 반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제목이 <학교 가는 길>로 바뀌면서 현실에 대한 감독의 태도가 조금 퇴색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학교를 찾아가는 소녀의 이야기보다는, 불상을 무너지게 만든 수치심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두고 영화를 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