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달려라 자전거 (2008)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 많지는 않을 이 영화에 대한 리뷰들을 죄다 찾아본다면 아마도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그러니까 <달려라 자전거>는 88만원 세대의 이야기라는 언급이 어디에선가는 한번쯤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한 때 X세대니 Y세대니 하면서 소비 특성의 연구 대상으로 지칭되기도 했던 10대, 20대들이 왜 지금에 와서는 하필이면 월평균 급여액으로 수식이 되어야 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1) 10년, 20년 전의 월평균 수입을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이 절대적이든, 상대적이든 지금 보다 더 잘 벌고 잘 썼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지 않나요. 특별한 여건의 소수를 제외하고는 그 시절에는 누구나 가진 게 없고, 미래는 불안하며, 막연한 희망을 안고 살아가지 않던가요. 그리고 사랑은 열병처럼 잠시 찾아왔다가 이내 사라지곤 하지 않던가요.

< 달려라 자전거>의 주인공들 역시 바로 그와 같은 시절을 통과하고 있을 따름입니다. 임성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달려라 자전거>는 갓 스무살의 첫사랑에 관한 영화이기는 하지만 단순히 연애 감정과 에피소드만을 묘사하는 2차원적인 멜러라기 보다는 힘겨운 시절을 묵묵히 견디며 미래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 삶의 한 시기에 관한 영화로 보여집니다.2) 주인공들과 같은 갓 스무살 또는 이십대 초반의 나이이거나, 9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백수로 지내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야만 공감대를 느낄 수 있는 좁디 좁은 앵글의 영화는 아니라는 겁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믿음을 필요로 하는 이라면 누구든지, 그의 나이와 경험의 폭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영화 속 주인공들과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지켜봐줄 수 있는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20대 백수 수욱(이영훈)이 응원하는 스노우퀸이라는 경마는 우승할 가능성이 아주 희박한 말이지만 그 만큼 배당금이 엄청나지요. 수욱이 스노우퀸을 특별히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어떤 말 보다도 가장 열심히 달리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정말 스노우퀸이 언젠가 우승을 하리라고 믿느냐는 질문에 수욱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렇다고 답변을 합니다. 수욱의 답변은 3년째 병상에 누운 여자친구(허진용)의 회복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곧 하정(한효주)에게도 꼭 필요한 미래의 희망으로 이어지기도 하기 때문에 이내 두 사람은 함께 스노우퀸의 우승을 기원하게 됩니다. 결국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그리하여 마치 자신의 인생이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죄스럽기까지 하지만 하정은 스노우퀸으로 상징되는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 만큼은 쉽게 버리지 않습니다.

이사와 대학 입학, 책방과 쏟아지는 햇빛 때문에 영화의 도입부는 이와이 슈운지 감독의 <4월 이야기>(1998)를 연상케 하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아무래도 허진호 감독의 그것과 닮아 보입니다. 아주 사실적인 낮은 톤으로 진행되다가 이따금 시트콤 분위기로 빠지는 것은 극의 분위기를 살리기 보다 약간 어리둥절한 느낌을 주는 편입니다. 그러나 저예산으로 만들어진 감독 데뷔작으로서 이만하면 관객 입장에서 보기에도 만족스럽다 할 수 있는 고른 완성도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사전 작업이 충분하게 이루어졌고 한효주, 이영훈, 허진용, 이 은 등과 같은 젊고 역량 있는 배우들을 캐스팅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처럼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배경이라고 생각됩니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결말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 저 역시 바랬던 것도 딱 그런 정도였던 것 같습니다. 삶은 그 이후에도 계속 될테니 고작 그게 전부냐는 말씀은 부디 하지 말아주세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1) 88만원 세대라는 말은 작년 말 대통령 선거 직전에 나타나 일약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가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지금은 자취를 완전히 감춰버렸습니다. 특별히 새로운 희망의 시대가 열린 것도 아니고 모든 경제 지표는 악화 일로에 있는 데도 말이죠. 우석훈, 박권일 공저의 <88만원 세대>는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2007년 8월에 출간되었습니다.

2) 실은 절절한 연애 감정의 묘사가 좀 더 자세하게 나와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달려라 자전거>는 그런 순간들에 대한 묘사를 과감히 생략해버림으로써 사랑 보다는 삶에 관한 영화로 기억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