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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소녀, 진실이 말소된 도시에서 홀로 싸우다.

영화 <더 걸>의 원제는 The Nasty  Girl 이다. Nasty는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는 단어이지만, 이 영화의 내용을 돌이켜 보면, "괘씸한 소녀"가 가장 적당한 번역이 아닐까 싶다. 나치 시대의 과오를 대표적인 한두 인물에만 뒤집어 씌우고는, 깨끗한 척, 고결한 척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독일의 한 마을 사람들에게 과거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진 소녀는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평소에는 친절하고 다정했던 이웃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혹은 신나치주의에 봉사하기 위해 이 괘씸한 소녀를 공격하고, 방해하고, 괴롭히는 방식은 정말 상상을 초월할 정도이니까.

그러나 "불편한 진실"을 숨기려는 시민들의 위선과 폭력 앞에서 총명하고 정의로운 소녀가 겪는 고난기를 그린 이 영화는 의외로 밝고 경쾌하며 유머로 가득 차 있다. 다큐멘터리 같기도 한 분위기와 심각한 주제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빠르면서도 경쾌한 분위기가 지배적이며, 특히 초반부의 어린 시절 묘사는 그 귀여움과 엉뚱함으로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어린 시절, 요리된 생선을 강물에 놓아줄 정도로 당돌하고 엉뚱하던 소냐는 학교에서 총명하고 사랑스러운 소녀로 자라난다. 소냐가 다니는 카톨릭 스쿨은 임신한 여성의 모습을 보는 것이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보수적인 동시에 기부금 액수에 따라 노골적으로 학생들을 차별하는 뻔뻔한 선생님들이 만연한 학교이다. 어느날 대통령 주최 에세이 공모전에 나가기 위해서 "2차대전 시절 내 고향"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소냐는 마을 어디에서도 관련 자료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에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기밀 자료다, 대출되었다, 추적 불능이다, 등등 끝없는 핑계를 대며 자료를 공개하지 않는 관청 직원들과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피하기만 하는 마을 사람들에 맞서 싸우기 시작한 소냐는 급기야는 시 전체를 "문서 은닉죄"로 고소하고, 결국에는 승소하여 진실을 알리는 글을 써서 책으로 출간을 하게 된다. 용감하게 역사를 바로 잡은 공로로 외국 유명 대학들로부터 명예박사학위까자 받게 되자 마지못해 소냐의 공로를 인정하게 된 마을 사람들이 그녀에게 갑자기 호의적이 되고, 심지어 그녀를 칭송하기까지 하자, 소냐는 혼란에 빠진다.


우리가 이 영화에서 만나는 이야기는 감독이 언급했듯이 특정 도시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광범위하게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며, 단순히 독일만의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소냐가 에세이 공모전에서 상을 타서 유명해졌을 때에는 온갖 칭송을 하다가 그녀가 과거를 캐고다니자 싸늘하게 돌변하는 이웃들, 인간적으로 함께 지낼 때에는 전혀 사악하지 않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혹은 치부를 감추기 위해) 섬찟하도록 적대적으로 변하는 모습들, 그들은 바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유대인들을 탄압하거나 그에 대해 눈감았던 수많은 주민들과 동일한 사람들이며, 나찌에 대해 저항했던 도시라는 가면을 쓴 카톨릭 보수주의 도시의 본 모습이었다. 반면에 자신의 신념을 위해서 가족의 위험을 무릅쓰는 소냐의 용기와 모두가 외면할 때에도 끝까지 딸을 지지해주는 부모의 애정과 포용은 깊은 인상을 준다.

세트를 사진 배경으로 처리하고 조명으로 인물들을 부각시키는 촬영 방법을 사용하여 연극적인 분위기를 내는 개성있는 연출 방식은 독특하면서도 흥미로왔으며, 법정에서 정의의 여신이 졸고 있는 모습이나, 가족들이 앉아 있는 소파가 거리를 배경을로 움직이는 장면 등은 다소 오래된 이 영화를 신선하고 재미있어 보이게 만들기도 한다.

Passau 라는 도시의 Anja Rosmus 라는 소녀에 대한 실화를 기반으로 한 이 영화는 첫 장면에서 "1939년에서 1945년 사이에 그대는 어디 있었는가. 지금은 어디 있는가." 라는 문장을 보여준다. (지난 겨울에 보았던 루마니아 영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가 생각나기도 하는 대목이다.) 현재의 삶과 1945년 이전의 삶이 얼마나 관련이 있냐고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시 전체를 고소한 소녀 소냐는 이렇게 말한다. "과거를 모르면 미래를 열 수 없죠."


영화에서 가상의 무대가 된 도시 "필징"은 "Pfilzing Syndrome", 즉 나치 시대의 치부를 망각하려는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제기한 모양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끊임없이 드러내고 돌아보는 것에 독일인들만큼 철저한 국민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일부 신나치주의자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빌리 브란트를 비롯한 정치인들이 앞장서서 과거를 반성하고 사죄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일본이나 우리나라와는 너무나 대조적이니까.

영화 내내 가벼운 톤을 유지해 오던 이 영화는 마지막 장면에서 묵직한 슬픔을 남긴다. 그녀를 동상으로 박제하려는 걸 거부하고 결국 기적의 나무로 숨어 절규하는 소냐의 얼굴이 한동안 잊혀지지가 않는다. 나찌 전범을 소재로 한 영화 중에 유사한 것으로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제시카 랭과 아민 뮐러-슈탈 주연의 <뮤직 박스(1989)>도 꽤 유명하다. 역사의 진실을 밝혀감에 따라 섬찟한 진실이 드러나고, 그 앞에서갈등하는 딸의 모습을 담아낸 작품이다. 내가 밝혀야 하는 진실이 가족에 관련한 것이거나, 이웃에 관한 것인 경우에는 사람들은 더욱더 갈등에 빠지게 되고, 그렇지 않더라도 진실을 밝히는 일에는 언제나 커다란 댓가가 따를 때가 많다. 게다가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이 도리어 비난을 받거나 위협을 당하는 상황은 우리 주변에서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다.

어느 시대에서나 위협에 맞서 신념을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동시에 숭고한 일이다. 전시의 상황 중 나찌의 위협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신념을 지키든, 평화로운 시대에 친근한 이웃들의 교묘하고 악랄한 위협 아래에서 신념을 지키든 간에 말이다. 이런 숭고한 일을 해내는 사람들이 없는 한, 역사의 정의는 언제나 짓밟혀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정의가 짓밟혀진 나라에서, 가해자들이 편안하게 발 쭉 뻗고 잠자리에 드는 역사는 계속해서 반복되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