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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더 걸 (Das Schreckliche Madchen, 1990)



과거를 숨기고 살던 나치 전범들은 끝내 은폐되었던 진실이 밝혀지면서 붙잡히고야 만다. 적어도 영화 속에서는 그렇다. 최근에 개봉했던 스파이크 리 감독의 <인사이드 맨>(2006)은 9.11 이후의 미국 사회에 관한 풍경화 같은 작품으로 만들어졌지만 줄거리 상으로는 결국 나치 전범을 하나 잡아내면서 끝을 맺는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 제시카 랭 주연의 1989년작 <뮤직 박스>는 이쪽 계통 영화로는 거의 마스터피스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고 찔리는 사람이 많았던 탓인지 당시 미국 영화계에서는 외면을 당하고 말았다. 이듬해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제시카 랭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것이 전부였던 <뮤직 박스>는 베를린 영화제에서 금곰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거둔 바 있다. 미하엘 베어회벤 감독의 <더 걸>은 바로 그 1990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은곰상을 수상했던 작품이다. <더 걸>은 그 다음해 1991년 골든글로브와 아카데미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지만 역시나 수상은 하지 못했다. 1989년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해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 과거를 재조명해볼 필요가 있었던 시점이었다고나 할까.

시기적으로나 내용면에서 모두 <뮤직 박스>와 좋은 한 쌍을 이루게 되는 <더 걸>은 무엇보다 냉전 시대 독일 내부에서의 경험담과 목소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안자 로스무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면서도 어디까지나 픽션임을 서두에서부터 밝히고는 있지만 그와 동시에 독일 어디에서나 발견될 수 있는 이야기, 모든 이들의 고민거리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사실 <더 걸>은 조작된 진실을 밝혀내기 위해 헌신했던 한 개인의 투쟁사라는 외피 속에서 그와 같은 은폐와 조작을 가능하게 만드는 매커니즘 전체를 건드리고 있다. 주인공 소냐(레냐 스톨체)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데에 상당한 긴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점이나 지나치게 전복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의 결말을 채택하고 있는 점, 그리고 기본적으로 페이크 다큐멘터리이면서 때로는 연극 무대를 보는 듯한 자유분방한 표현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점 등은 모두 <더 걸>이 20세기 서독에서 있었던 특정 사건에 관한 영화로만 읽히지 않게 해주는 요소들이다.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각 개봉임에도 불구하고 그 세월의 격차가 느껴지지 않는 것은 아무래도 과거사 규명과 정리 과정에 관한 한 남부럽지 않은 진전과 퇴행의 이력을 밟아나가고 있는 우리의 현실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