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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자유로운 세계> 윤리와 도덕이 불가능한 세상

<자유로운 세계> 윤리와 도덕이 불가능한 세상

Germany,England,Italy;2007;96min;color
Director:Ken Loach
Casting:Kierston Wareing, Julliet Ellis, Leslaw Zurek


켄 로치(Ken Loach)의 영화는 항상 진보, 좌파, 정의, 노동자와 연결돼 있다. 각각의 단어들이 책에서는 미묘한 차이를 갖겠지만 현실에서는 보수, 우파, 질서, 자본의 다른 편에서 한 축을 이루고 있는 개념 혹은 현상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켄 로치는 항상 진보적인 감독, 좌파 영화의 첨병, 전 세계 노동자의 대변자와 같은 수식어를 얻게 되었다. 그것이 그의 의도였든 아니면 그의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만든 수사였든 그가 동시대 영화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세계 유수의 감독들이 그에게 찬사와 존경을 보내고, 많은 관객들이 그의 신작 소식에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1967년 <불쌍한 암소(poor cow)>로 데뷔한 이래 25편 남짓의 극영화를 만들어 온 영국 출신의 노장 감독이 받고 있는 이 융숭한 대접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40년이 넘는 영화 인생을 통해 그는 자신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을 그려가고 있다. 그것은 곧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이다.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 종속된 인간이 해방되기를, 그래서 인간이 가진 본연의 선함이 실현되기를 그는 희망한다. 그의 영화가 현실에 대해 매서운 비판적 시각을 견지하면서도 그 안에서 따뜻함을 느끼게 되는 이유는 그 기저에 항상 '사람'이 있어서이다. "착취는 사람이 아니라 '시스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에서 그의 철학과 고집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때문에 켄 로치의 영화는 그가 태어난 영국이라는 공간과 현재라는 시간의 경계를 넘어선다. 그의 카메라는 내전을 겪었던 스페인(랜드 앤 프리덤)과 니카라과(칼라 송)에 머물렀다 미국의 이주노동자들(빵과 장미)을 건너 독립전쟁 시기 아일랜드(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에까지 이른다.

그의 영화들이 이렇듯 공간과 시간을 관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영화들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전지구적이고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착취 문제는 신자유주의가 범람하는 현재 상황에서 어느 단일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동시대를 관통하고 있다. 그의 영화가 신자유주의가 대대적으로 전세계를 휩쓸기 시작한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이 이를 증명한다. 현실 세계는 그의 희망과 정반대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노동자에게는 빵 한 조각의 배부름 뿐만 아니라 장미 한 송이의 향기도 필요하다는 소소한 가치를 강조하는 그의 앞에 펼쳐진 세상이란 전 세계의 노동자들이 글로벌 자본에 영구적으로 종속되는 신자유주의의 범람일 뿐이다. 윤리와 도덕이 불가능한 세상. 그 세상에서 켄 로치는 그 거대한 물길을 돌리기 위한 힘겨운 싸움을 영화를 통해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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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최대 화제작 중 하나였던<자유로운 세계>는 켄 로치가 2000년 <빵과 장미> 이후 신자유주의의 추악함을 다시 한 번 스크린으로 옮긴 영화다. <빵과 장미>가 미국으로 넘어온 멕시코 불법 이주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그렸다면 이번 영화는 동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지역에서 유럽으로 흘러온 노동자들에게 카메라를 비추고 있다. 직업과 경력,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자국에서 일자리를 구할 수 없는 이들이 영국으로 건너와 이중 착취의 대상이 되는 모습이 켄 로치와 그의 영화적 소울 메이트라고 할 수 있는 폴 래버티의 손에 의해 영화로 태어났다. 이 영화의 원제가 <These Times>인 만큼 영화는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동시대 국제질서의 중심에 정면으로 비수를 꼽고 있다. 국내 개봉 제목인 자유로운 세계와는 영 딴판인 절대 자유롭지 못한 세계가 비판의 핵심이다.

극중에서 앤지는 노동자다. 정확히 말하면 화이트 칼라의 노동자다. 그녀는 비유럽(정확히 말하면 영국과 서유럽이 아닌 모든) 지역의 노동자들과 그들을 필요로 하는 영국 내 기업을 연결시켜주는 일종의 헤드헌팅 업체에 근무하는 여성이다. 앤지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하나 뿐인 아이를 부모님에게 맡겨두고 성희롱이 난무하는 회사에서 최고의 업무실적을 기록할만큼 일에 있어 헌신적이다. 하지만 부당한 인사조치로 인해 그녀의 월급쟁이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역할은 끝이 난다. 하루 아침에 그녀는 애 딸린 실업자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 순간 앤지는 노동자에서 스스로 이윤을 창출하는 사업가로 변신을 시도한다. 자신의 경력을 살려 친구와 함께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닌 착취자가 되는 것이다.

<자유로운 세계>의 핵심은 바로 노동자였던 앤지가 착취자로 변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 있다. 감독이 그토록 경멸하는 시스템 안에서 도덕과 윤리를 잃어버리는 착취자가 될 수밖에 없는 앤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당장 법인을 만들 여력이 되지 않는 앤지는 일단 불법으로 노동자와 업체를 연결시켜 준다. 남자들에게 기죽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얕보이지 않기 위해 그녀는 가죽점퍼에 오토바이를 타고 강한 음성으로 스스로를 철저히 무장한다. 변한 겉모습과 달리 앤지는 기본적으로 위기에 처한 이란인 불법 이주 노동자가 일을 할수록 돕고, 그의 가족이 살 곳을 마련해 줄 정도로 선한 마음을 간직한 사람이다. 하지만 이 일을 계기로 앤지는 불법 이주 노동자들에게 더 많은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업계의 '진리'를 알게 된다. 시스템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앤지가 또 하나의 착취자로 탈바꿈하는 순간이다. 이제부터 그녀에게 도덕과 윤리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고, 하나뿐인 아들과 단둘이 살 수 있도록 될 수 있는 한 많은 '돈'을 모으는 것만이 있을 뿐이다.

앤지의 변화는 결국 노동자들과의 갈등을 낳고 그녀를 파국으로 몰고간다. 노동자들의 임금을 빼돌리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주 노동자를 악용하는 모습에 친구 로즈가 떠난다. 뒤이어 강도로 변한 노동자들에 의해 그녀의 목적이었던 '돈'을 뺏기고 아들의 안전 역시 위협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결국 그녀는 노동자에게 진 빚을 갚기 위해 또 다른 노동자로부터 더 큰 착취를 하게 되는 괴물로 변한다. 영화는 그렇게 비극적으로 끝이 난다. 마지막 앤지는 윤리와 도덕과 동떨어진 인물이 되어 있다. 그녀 입장에서는 살기 위한 선택이었다. 시스템 안에서 윤리와 도덕은 애초에 거부의 대상인지도 모른다. 시스템은 사람들이 윤리와 도덕을 무시하도록 종용한다. 그저 돈의 흐름에 충실히 따르도록 중독시킨다.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세계에서 그것이 도덕이자 윤리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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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유럽 지역에서 넘어온 노동자들은 제대로 된 임금과 복지혜택 없이 일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빵이 필요해서 왔지만 장미 역시 원하는 사람들이다. 해당국가들은 이들의 수가 늘어날수록 육아, 교육, 근로복지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외부에서 유입된 노동자들에 의해 현지의 인력들은 일자리를 잃는다. 일자리를 잠식당한 사람들은 분노의 화살을 이주민에게 돌리고 이는 원형 민족주의 재등장의 단초가 된다.(독일에서 나치가 재등장하는 예가 그렇다.) 결국 서로의 필요에 의해 모인 사람들끼리의 갈등이 태어난다.(최근 프랑스의 연이은 소요사태가 대표적이다.) 여기에 인종과 종교, 민족 문제는 갈등을 강화시키는 촉매 역할을 한다. 이것이 현재 영국과 서유럽 국가들이 당장 해결해야 할 고민이다.

이 문제는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의 사생아이다. 전 세계의 산업 구조를 강대국, 자본, 기업에 편하도록 짜맞춰놓은 신자유주의는 노동의 흐름 역시 변화시켰다. 주변국의 노동자들은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아 불법, 탈법 가리지 않고 미국과 서유럽 등 선진국으로 향하고 있다. 켄 로치는 앤지라는 한 여성의 변화를 통해 그 현상이 가지고 있는 비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인 측면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올라가지 않는 경제 성장률과 실업, 이민 문제는 영국에서 노동자로 살아가는 앤지가 처한 하나의 피할 수 없는 구조다. 그 구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는 선택은 피부색과 언어가 다른, 힘이 약한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 속에서 갈등은 증폭되고 반복될 수밖에 없다. 악순환의 연속이다.

해결책은 없을까?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원래 노동자들끼리 연대해 저항하는 촬영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완성본에서 그 장면은 빠져 있다. 노동자들끼리로 국적과 피부색, 언어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저항을 위한 조합 형태의 연대를 이루기란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인 해결책은 과연 없는 것일까? 감독은 여기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혹자는 이것을 켄 로치의 한계로 지적할지도 모르겠다.(켄 로치는 전작들에서 '행동'을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의 처음에서 강조했듯이 켄 로치는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애정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가 기대하는 것 역시 인간의 윤리와 도덕의 회복이다. 비록 현실 세계가 윤리와 도덕이 불가능한 시대지만 그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 희망 때문에 그는 계속 영화를 만들어 내는지도 모른다.

P.S. 켄 로치의 영화는 사회성이 짙고 비판적이면서도 상당히 문학적이다. 이야기가 재미있고 구성이 탄탄하다는 의미다. (초기작 <케스>부터 최근작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까지 적지 않은 영화가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켄 로치의 영화가 계속 기대가 되는 것은 반복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자유로운 세계> 역시 이야기만으로 충분히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영화다. 여기에 극의 대부분을 혼자 이끌고 있는 키얼스틴 워레잉(앤지)의 변화무쌍한 연기가 인상적이다. 벌써 촬영을 마친 다음 영화는 축구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영국인답게 켄 로치 영화에서 축구는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었는데 전면에 등장하기는 처음이다. 벌써 기대가 된다. 이번에는 또 어떤 이야기를 보여주고 들려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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