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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비몽] 집착을 넘어 파멸로 이어지는 지독한 사랑



비몽 (悲夢)
김기덕 감독, 2008년

사랑은 그리움과 미움이 공존하는 것   

사랑에 아파해본 적이 있는가? 살아가면서 많은 종류의 고통을 겪기 마련이지만, 사랑의 아픔만큼 깊고 오래가는 고통도 없다. 사랑의 시작은 달콤할지언정 그 끝은 언제나 고통스럽다. 여러 번의 상처 속에서 사랑의 순수함과 낭만은 어느 샌가 사라지고 만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랑을 꿈꾼다. 그래서 사랑은 지독하다. 고통을 줄 것을 알면서도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김기덕 감독의 신작 <비몽>은 감독 스스로도 밝혔듯이 사랑에 대한 영화다. 그것도 지독한 사랑에 대한 영화다. 두 주인공 진(오다기리 죠)과 란(이나영)은 막 끝나버린 사랑의 아픔에 빠져 있는 인물이다. 진은 자신을 버린 여자친구를 그리워하고 있고, 란은 자신이 버린 남자친구를 미칠 듯이 미워하고 있다. 문제는 두 사람이 꿈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진의 꿈은 란의 현실로 작용한다. 진이 꿈속에서 여자친구를 만나면, 란은 현실에서 남자친구를 만나야 한다. 곧 진의 그리움은 란의 고통이 될 수밖에 없으며, 동시에 란의 미움 역시 진의 고통이 될 수밖에 없다. 그리워해도, 미워해도, 고통스러운 것. 이것이 바로 <비몽>이 이야기하고 있는 사랑이다.

이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영화 중반의 갈대밭 신이다(감독도 이 신에 영화의 주제가 담겨 있다고 밝혔다). 진과 란을 중심으로 진행되던 영화는 이 신에 이르러 진과 란의 옛 연인들까지 포함한 네 명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진과 란의 옛 연인들은 차에서 사랑을 나누고, 이를 진과 란이 바라본다. 그러나 곧 옛 연인들은 사소한 말다툼을 하게 되고, 이 말다툼은 다시 진과 란의 말다툼으로, 다시 진과 옛 여자친구, 란과 옛 남자친구의 말다툼으로 바뀐다. 이를 통해 영화는 이 네 사람이 곧 하나일 수 있음을 드러낸다. 집착에서 시작된 사랑은 그리움과 미움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말다툼이 사소한 질투에서 시작됐다는 점은 사랑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통해 <비몽>이 이야기하려는 사랑의 의미는 보다 명확해진다.

만약 <비몽>이 김기덕 감독의 전작에 비해 불친절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것은 영화의 복잡한 대칭구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작품에서도 김기덕 감독은 변함없는 이분법적 시각으로 세상을 꿈과 현실로 나누어 보고 있다. 하지만 <비몽>은 꿈과 현실의 느슨한 경계 속에서 두 남녀에서 네 남녀, 다시 두 남녀의 이야기로 돌아오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로 인해 관객에게는 생각할 여지가 좀 더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또한 대부분 한옥에서 촬영된 영화는 어떤 김기덕 감독의 영화보다도 고풍스럽고 수려한 영상을 선보이지만, 정작 영화의 주제에는 스며들지 못하고 어딘가 동떨어진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영화의 감성이 전작보다 앙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겉보기엔 난해해보일지 몰라도 <비몽>은 결국 보편적인 사랑 이야기다. 현실에서 고통 받는 란을 위해 잠을 자지 않으려고 자해까지 하는 진의 모습은 사랑의 지독함을 가장 잘 보여주는 동시에 타인의 고통을 스스로 짊어지려고 하는 또 다른 사랑의 표현이기도 하다. 진과 란의 극단적인 행동들을 한 꺼풀 걷어낸다면, 그들의 고통에 동참할 수 있다. 그러니까 <비몽>은 김기덕 감독 나름의 방식으로 풀어낸 사랑영화인 것이다.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