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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바시르와 왈츠를: 잊혀진 기억을 통해 드러나는 끔찍한 학살의 진상

바시르와 왈츠를
감독 아리 폴먼 (2008 / 독일, 프랑스, 이스라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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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에 방영한 EIDF 프로그램 중 '내가 정말 미소짓고 있었을까'라는 작품을 인상깊게 본 적이 있었다. 이스라엘에서 여군으로 복무한 여성들을 인터뷰한 다큐멘터리였는데 여성들의 군복무 당시 있었던 경험을 환기함으로써 군대가 만들어낸 비인간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의무장교로 복무했던 한 여성의 인터뷰 장면은 이 영화의 제목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군 복무 시절 팔레스타인의 시체를 닦던 중 성기가 발기된 것을 보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 후 그 사진 속의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궁금하다고 말한다. 이후 자신과 함께 복무했던 동기의 집에 찾아가 사진을 본 그녀는 마치 자신의 비인간적인 모습을 발견한 듯 어쩔줄 모르는 표정으로 말한다. '어떻게 그 일을 잊을 수 있다고 생각 했을까요?' 그녀의 마지막 말처럼 전쟁 속에서 벌어진 비인간적인 과오는 결코 잊혀질 수 없는 것이다.

'바시르와 왈츠를'이란 영화도 감독 자신의 군복무 시절 잊혀졌던 자신의 기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거리를 내달리는 들개들이 한 곳에 모여든 후 고층에 있는 한 남자를 노려본다. 이후 두 남자의 대화를 통해 이것이 다름아닌 안경 쓴 남자의 꿈이었음이 드러난다. 안경 쓴 남자는 이 꿈을 통해 자신의 군복무 시절 있었던 일을 환기했다고 고백한다. 레바논 침공[각주:1] 당시 이스라엘 군을 향해 짖어대는 개들로 인해 적들에게 들통날 것을 막기 위해 개들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친구와의 대화 후 영화제작자인 감독은 차를 타면서 자신의 군복무 시절 레바논에서 있었던 전쟁의 기억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가 기억하는 영상은 꿈을 통해 본 정체불명의 이미지일 뿐이다. 노란 조명탄이 떨어지는 해안가의 도시를 향해 벌거벗은 세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해변에 상륙한 뒤 군복을 입는다. 이후 거리를 걷던 주인공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아랍 여인들의 실루엣을 멍하니 바라만 본다. 과연 이 꿈의 정체는 무엇일까? 감독은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환기하기 위해 1982년 레바논 침공 당시 자신과 함께 복무한 동기들을 찾아 그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전쟁에 대해 아무런 기억이 남아있지 않았던 주인공은 전우들을 만나면서 군복무 당시 있었던 학살에 관한 기억들을 하나씩 환기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 레바논 침공 당시 감독과 함께 전쟁에 참전한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있었던 전쟁의 모습을 그려내며 이들의 인터뷰를 시간 순으로 전개시키며 드러나지 않았던 레바논에서의 학살의 진상을 폭로한다. 하지만 감독은 단순히 실사화면으로 인물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방식 대신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마치 실사 인물과 유사한 모습을 표현한 로토스코핑 기법을 사용한 '스캐너 다클리'가 연상될 정도로 디테일하게 묘사된 인물들의 모습이 인상적인데, 단지 영상미를 위해 애니메이션을 활용하지 않고 인물들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예를 들면 여성의 육체에 매달린 군인의 모습을 통해 전쟁의 비인간성에서 구원받고 싶어하는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고 있다. 또한 전우들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나는 전쟁의 잔인함과 비정함을 자료화면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하는데 그치지 않고 애니메이션을 통해 당시의 전쟁의 긴박함을 디테일하게 재구성함으로써 관객들에게 주인공의 기억 속의 전쟁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 70년대 초반 팔레스타인들이 요르단에서 레바논으로 유입되면서 보이지 않는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 레바논은 기독교, 그리스 정교, 이슬람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나라였기 때문에 팔레스타인들의 유입은 기독교인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1975년 팔레스타인이 타고 있던 버스를 팔랑헤 당 - 레바논 카테브 당 (Lebanon Kataeb Party), 동방 카톨릭인들의 지지를 받은 당이라고 한다 - 민병대들이 공격함으로써 20여 명이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레바논 내의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교 세력은 내전을 벌이게 된다. PLO를 지지하는 시리아와 팔랑헤 당을 지지하는 이스라엘이 개입되면서 레바논 내전은 걷잡을 수 없는 혼돈으로 빠져들게 된다. PLO 세력을 소탕하기 위해 1982년 6월 이스라엘은 6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레바논을 침공한다. [본문으로]
  2. 이 영화에서 고발하고 있는 사브라(Sabra), 샤틸라(Shatila) 학살극은 바로 이스라엘 군의 레바논 침공 당시 발생한 사건인데, 팔랑헤 당 지도자이자 레바논의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시르 게마옐(Bashir Gemayel)이 폭탄테러로 인해 암살당하자 팔레스타인들에게 반감을 갖고 있던 팔랑헤 당원들이 테러리스트들을 색출한다는 명분으로 사브라, 샤틸라 수용소에 갇혀있던 팔레스타인들을 소환한 뒤 그들을 학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는데 사망자 수는 300 ~3000 명 정도라고 한다. 이스라엘 군이 팔레스타인들의 학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지만 영화에서 보여지듯이 팔랑헤 민병대들이 팔레스타인들을 학살하도록 방조한 면이 있다. 결국 학살이 밝혀지면서 이스라엘 내,외부에서 비난여론이 일자 당시 이스라엘의 국방부 장관이었던 아리엘 샤론은 장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후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벨기에에서 샤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지만 대법원은 원고들 중 벨기에 국적을 가진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소송을 기각했다고 한다. 한편 학살의 주동자인 팔랑헤 민병대 사령관인 엘리 호베이카 (Elie Hobeika)는 2002년 1월 24일 폭탄테러로 암살 당한다. (사건의 배후는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고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