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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렛 미 인] 고독한 소년 소녀,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다



렛 미 인 (Let The Right One In)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2008년

올 연말 최고의 멜로영화

연말용 멜로영화가 있다. <러브 액츄얼리> 같은 영화 말이다. 나는 연말용 멜로영화가 싫다. 그런 영화에는 사랑의 따뜻함은 있을지언정, 사랑의 본질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영화가 좋을 수도 있다. 그건 전적으로 취향의 문제다. 그럼에도 피상적인 사랑을 이야기하는 멜로영화가 아닌, 진심이 담긴 멜로영화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스웨덴 출신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이 연출한 <렛 미 인>에는 가슴 설레게 하는 만남도, 핑크빛 로맨스도 없다. 주인공은 어른도 아닌 아이들이며, 심지어 여자아이는 뱀파이어다. 하얗게 눈 내린 스웨덴의 풍경에서는 서늘함이 느껴지고, 호러영화에서나 볼 법한 고어 신까지 등장하는 <렛 미 인>은 그러나 올 연말 최고의 멜로영화다.


금발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소년이 창밖을 바라본다. 한 손으로 날카로운 칼을 쥐어들고는 누군가를 향해 “기어가, 돼지 같이”라고 읊조리는 소년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바로 외로움이다. 그런 소년의 옆집에 창백한 얼굴을 지닌 소녀가 이사를 온다. 소년은 학교에서 같은 반 아이들에게 이유도 없이 괴롭힘을 당하고 있고, 소녀는 낮에는 하루 종일 집에만 있다가 밤이 돼야 집 밖을 나선다. 소년에게는 엄마가 있지만, 엄마는 소년이 지닌 마음 속 상처를 헤아릴 여유가 없다. 소녀의 아빠는 소녀를 위해 신선한 피를 구해주다 얘기치 못한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어른들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소년 소녀. 그들은 이미 아이가 아니다. 그리고 세상과 어울릴 수 없는 그들이 짊어져야 하는 고독은 그들에게 너무나도 크다. 고독한 소년 소녀는 마침내 오직 둘만이 서로의 고독을 치유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렇게 둘은, 사랑에 빠져든다.

<렛 미 인>에는 어떤 멜로영화보다도 가슴을 설레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다. 아빠가 죽은 뒤 슬픔에 잠긴 소녀는 소년을 찾아가 같은 침대 위에 눕는다. 소녀에게 등을 돌린 채 소년은 부끄러워하면서 얘기를 꺼낸다. “우리 사귈래?” 멜로영화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대사지만, 이 순간 <렛 미 인>만큼 심장을 뛰게 한 영화는 없었다. 아이들의 대화이지만 거기에는 사랑에 대한 진심이 느껴진다. 사랑이란 결국 누군가의 초대에 응하는 것과 같다. 소년의 집을 찾아간 소녀는 소년에게 자신을 초대해달라고 말하지만, 장난기가 발동한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손가락만 까딱거린다. 그러자 소녀는 갑자기 온몸으로 피를 쏟아내기 시작한다. 초대의 거부, 그것은 곧 만남의 거부이며, 상대방과 타인으로 남겠다는 뜻과 다름없다. 중요한 것은 소년과 소녀는 누구에게나 초대받을 수 없는 존재들이라는 것이다. 온몸으로 피를 흘리는 소녀의 행위는 곧 소년이 아니라면 자신에겐 죽음뿐이라는 은유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이런 사랑이라면, 정말이지 이끌리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소년과 소녀도 변한다. 소년은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들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기만을 거부하고, 소녀는 그런 소년을 돕는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엔딩은 역설적으로 사랑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보여준다. <렛 미 인>은 스크린에서 입김이 새어나올 것만큼 서늘하고 정적인 정서로 가득한 영화지만, 오히려 그 차가움을 통해 사랑의 진심을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다. 어떤 멜로영화로도 녹일 수 없었던 나의 얼어붙은 심장은, 외로운 소년과 뱀파이어 소녀를 통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