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나는 인어공주> 환타지가 불가능한 세상에서 꿈꾸는 환타지

<나는 인어공주> 환타지가 불가능한 세상에서 꿈꾸는 환타지

Russia;2007;118min;35mm;Color
Director: Anna Melikyan
Casting: Masha Shalaeva, Yevgeniy Tsyganov
 
한 번도 바다 위를 구경해 보지 못한 인어공주는 자신의 15번째 생일에 물 밖을 구경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바다 위 구경을 나선다. 공주는 마침 바다 위를 항해 중이던 왕자를 보고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때 폭풍이 일어 왕자가 탄 배는 침몰하고 공주가 정신을 잃은 왕자를 구해낸다. 인어공주는 왕자의 곁에 있고 싶어서 자신의 목소리를 마녀에게 주는 대신 사람의 몸을 얻어 왕궁에 들어가서 시녀가 된다. 그러나 왕자는 벙어리인 인어공주가 자신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형제들은 그녀가 다시 목소리를 찾고 인어공주로 돌아올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왕자의 피를 받는 것뿐이라는 걸 알려준다. 그리고 칼 한 자루를 그녀에게 건넨다. 하지만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왕자님을 죽이지 못하고 결국 바닷속으로 몸을 던져 물거품이 된다. <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1873년 덴마크의 동화작가 안데르센이 발표한 <인어공주>는 바닷속 인어공주의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다. 왕자님과의 사랑을 위해 목소리를 버리지만 바로 그 덫 때문에 왕자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인어공주. 훗날 사람들이 이 작품을 안데르센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바로 이 환타지와 같은 스토리에 잘 녹아든 극적인 비극성 때문일 것이다. <인어공주>가 지금 이 시기 2008년에 재현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그것도 왕자님이 사는 왕궁이 아닌 사회주의를 막 끝내고 자본주의의 단맛에 한껏 젖어있는 러시아로 그녀가 환생한다면... 러시아의 여성감독 안나 멜리키얀은 자신이 살고 있는 환타지와 같은 세상으로 과거의 인어공주를 초대했다. 그녀의 이름은 '알리사'. 동화 속 아름다운 목소리와 외모를 가진 공주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만큼 귀엽고, 통통튄다. 너무 튀는 게 문제가 되긴 하지만. 과연 다시 태어난 인어공주는 Sad ending이 아닌 Happy ending을 기대할 수 있을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알리사는 과거 선배 인어공주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스토리의 삶을 산다. 동화 속 현실이 아닌 상식이 지배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공간에서 그녀는 나름 괴짜로 적응해가면서 살고 있다. 러시아의 한 바닷가에서 태어난 알리사. 그녀에게는 자신을 너무도 사랑해주는 아버님과 친절한 자매들이 없다. 아버지는 사고(?)로 자신을 만들어 놓고 떠나버렸고, 지금 그녀는 남자만 보면 눈이 돌아가는 괴팍한 엄마와 아직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와의 로맨스에 빠져 살고 있는 할머니 뿐이다. 그녀의 꿈은 두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는 발레리나가 되는 것. 인어공주가 다리를 갖고 싶어하는 꿈이 현실적으로 적용된 듯 보인다. 알리사 역시 목소리를 대가로 꿈을 이룬다(발레 학원에 등록한다.). 다만 왕자님과의 사랑 때문에 목소리를 포기한 인어공주와 달리 딴 남자와 바람이 난 엄마에게 화가 나서 입을 닫기로 결정한다. 억지로 들어간 장애학교에서 뜻하지 않게 소원을 이루는 방법을 배운 그녀는 실수로 마을을 송두리째 날려 버린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은 인어공주가 뭍으로 나왔듯 바다를 떠나 도시로 나온다.

도시에서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그녀에게는 고난과 시련의 연속이다. 당장 세 식구의 안녕을 위해 엄마는 대형 슈퍼마켓에서 일을 해야 하고, 알리사 역시 휴대전화가 됐든, 생맥주가 됐든 뭐든 뒤짚어 쓰고 돈을 벌어야 한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사장은 늘 그녀에게 소리만 지르고 말도 되지 않게 빚만 떠안긴다. 노동자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없다. 인어공주가 그토록 가고 싶었던 육지와 달리 도시는 삭막하기 그지없는 곳이 었다. 모스크바는 대도시다. 사람들에게 국가를 위해 헌신할 것을 종용하던 갖가지 혁명 문구들이 있던 자리를 이제는 소비에 충성할 것을 강요하는 화려한 광고들이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알리사의 가족이 사는 아파트도 대형 광고판으로 덮혀 있다. 때문에 그녀는 대낮에도 빛을 보기 힘들다.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필히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학교를 가는 것도 예외가 되지 않는다. 경쟁에서 탈락하면 알리사처럼 소원을 비는 수밖에 없다. 소원은 이루어진다. 다만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할 뿐이다. 내가 얻으면 누군가는 잃게 되는 제로섬 게임의 도시.

생산, 분배 위주의 시스템에서 소비, 경쟁이 지배하는 시스템으로 바뀐 도시. 사회주의이라는 이론을 현실에서 실험한 과거 속 전설의 국가는 그렇게 시장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흐름 속으로 빠르게 잠식되고 있다. 시스템이 변화면서 사람들의 가치도 변하고 철학도 바뀐다. 어느 사회가 우월하다는 것을 따지는 것은 부질없다. 어디가 됐든 개인이 살아가기 좋은 환경은 아니다. 국가가 됐든, 자본이 됐든 무언가에는 충성하길 강요당하는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지금 시점에서 두 사회 모두 '사람'이 주체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차이가 있다면 사회주의가 노골적이라면 자본주의가 상당히 문학적이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본에 천천히 물들게 된다. 그 속에서 '객체화' 된 다른 사람들처럼 알리사 역시 역시 소비될 뿐이다. 휴대폰으로, 생맥주잔으로, 우주의 땅으로 사람들을 유혹하는 미지의 소녀로 모습을 탈피하면서 소비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시에서 살아갈 수 없다. 알리사에게서 발레리나의 꿈은 흔적 없이 사라진지 오래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 알리사는 멋진 왕자님도 만나고 자신을 알아주는 친구도 생긴다. 자본주의라는 변화된 시스템에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샤샤. 돈이 곧 도덕이자 윤리라는 철학은 '달의 땅을 판다'는 허무맹랑한 사업을 가능하게 했다. 그리고 대성공을 이룬다. 넘치는 돈을 그렇게라도 소비해야 하는 '부자'들이 있기 때문에. 하지만 돈, 외모, 명예, 거기에 쭉쭉빵빵 여자친구까지 갖춘 샤샤는 항상 결핍을 느낀다. 그가 가진 것은 모두 돈이 만들어준 것일 뿐 진정성과 가치는 없다. 그가 아끼는 것이라곤 어항 속 물고기가 전부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으로 술만 취하면 강으로 뛰어든다. 바다에 빠진 왕자를 인어공주가 구했듯이 알리사 역시 샤샤를 구하고 왕자님과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인어공주가 그랬듯 가정부가 돼서 그의 옆을 지킨다. <샤샤와 알리사> 왕자와 인어공주의의 관계는 삭막한 도시에서 서로에게 새로운 자극이자 '이상향'이다. 멈췄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드는 존재이고, 소통이 가능한 타자가 된다. 그들의 외로움이 서로 만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리고 알리사는 굳게 다물었던 입을 연다. 말을 한다고 해서 소통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타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말만 쏟아내기 바쁜 도시에서 언어는 더욱 무의미하다. 알리사는 그 곳에서 애초에 누군가와 소통하길 기대하지 않았다. 하지만 샤샤는 알리사에게 다시 말을 찾아준다. 사춘기 괴짜 소녀에게 찾아온 사랑. 누구에게도 마음을 준 적이 없던, 심지어 밤을 함께 보내는 여자친구에게까지 까칠했던 왕자님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돼 그녀와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긴다. 그녀를 위해 파인애플을 훔치고, 그녀를 웃기기 위해 공원에서 춤을 추며 괴성을 지른다. 이쯤되면 현대에 다시 태어난 인어공주는 과거와 달리 행복한 결말을 맞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인어공주로서 알리사의 운명은 그녀를 다시 선택의 순간에 이르게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인어공주로서의 운명에 충실한다.

행복한 삶을 살게 될 왕자님과 공주님, 물방울로 남은 인어공주. 제로섬 게임의 도시에서 알리사의 희생은 분명 누군가에게 기쁨이 됐을 것이다. 하지만 동화 속 인어공주와 달리 알리사의 표정은 그리 슬프지 않다. 그렇게 정해질 운명이었다는 듯, 모두 알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마지막 숨을 뱉는다. 알리사는 물방울이 됐을까? 바다가 아닌 대도시 어느 도로 아스팔트 위에서 쓰러진 또 한 명의 인어공주. 그녀는 몇 년 몇 월 몇 일 러시아의 교통사고 희생자 통계치를 하나 올려줄 뿐이다. 도시에서 그녀를 기억하는 건 그것이 전부이다. 어느 누구도 그녀의 희생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비극'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에게 슬픈 일이 아닌 늘상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어느 이름 모를 누군가의 희생으로 오늘의 값진 숨을 쉴 수 있는 게 아닐까? 마지막 알리사의 희생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안나 멜리키얀'이라는 생소한 러시아 감독의 두 번째 작품 <나는, 인어공주>는 굉장히 정치적이면서도, 동화 속 환타지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자본의 광풍이 휨쓸고 있는 도시인 모스크바의 곳곳을 카메라로 담담히 비추면서 그 곳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화려함 속에 가려진 외로운 이면을 그려내고 있다. 영화 사이사이 삽입된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화면은 극의 사실성을 높이면서도, 반대로 알리사의 상상 장면은 영화의 환타지적 느낌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감독은 우울한 현실에서 알리사가 꿈꾸는 환타지를 기대하는지 모르겠다. 환타지가 불가능한 세계에서 꿈꾸는 환타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