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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비몽> 김기덕식 경계 허물기

<비몽> 김기덕식 경계 허물기

Korea;2008;95mim;35mm;Color
Director: 김기덕
Casting: 이나영, 오다기리 조, 박지아, 김태현, 장미희

김기덕의 영화에서 고정된 것은 없다. 인물도, 이미지도, 이야기도 모두 유동적이다. "무엇은 무엇이다."라고 정의 혹은 설명하는 것이 그의 영화에서는 부질없는 짓처럼 보인다. 확실한 것도 없다. 삶과 죽음, 사랑과 증오, 젊음과 늙음, 공간과 시간 등 현실세계에서 너무도 뚜렷하게 구분되는 개념과 가치들이 그의 영화에서는 알 수 없는 형체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난해하다. 영화를 봐도 스토리가 잡히지 않고, 캐릭터도 불분명하다. 현재 충무로 감독 중 가장 포스트모던하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1990년대 중반 그가 <악어>를 처음 가지고 한국영화계에 등장했을 때 그는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반감을 샀다. 영화적 언어로 정화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를 화면에 담고, 모호한 메시지로 일관된 그의 영화는 장르영화들이 터를 잡고 있던 충무로에 발 붙일 곳이 없었다. 오죽 답답했으면 김기덕은 <악어>와 <야생동물보호구역>이 나오고 모 영화월간지를 통해 자신의 영화가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에 억울함을 호소한 적도 있다.

하지만 <파란 대문>부터 그는 천천히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이해를 키우기 시작했다. 그의 영화적 언어는 더욱 세련되어 졌고, 함축적이며 간결해졌다. 마치 스크린을 통해 그림을 보는 듯. 이후에도 <섬>과 <나쁜 남자>같은 초기작을 연상시키는 논란적인 영화를 만들기는 했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과 <빈집>으로 이어지는 그의 필모그래피는 그가 끊임없이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고민과 그 안에 무엇을 담아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을 쉬지 않고 있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빈집> 이후 <시간>, <숨>,<비몽>은 김기덕 감독 개인 영화 역사의 화려한 2막을 이어가고 있다. 2006년 <시간> 공개 시점에서 한 번 거센 파도를 겪긴 했지만, 그는 여전히 넘치는 창작열로 1년에 한 편씩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또한 <아름답다>, <영화는 영화다>와 같이 제작에도 참여하며 영화 유학 없이 자신과 함께 영화 작업을 한 후배들이 성장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되고 있다. 혹자의 평가처럼 이러다 영화계에 "김기덕 사단"이 나오는 날이 정말 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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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어김없이 그의 새로운 영화 한 편이 찾아왔다. 제목은 <비몽>. '슬픈 꿈'이란 의미의 영화는 김기덕 감독의 이전 작품과 달리 스타급 배우들의 캐스팅으로 제작 전부터 화제를 몰고 왔던 작품이다. <해안선>에 장동건이 출연을 한 적은 있지만 김기덕 감독 영화의 특성상 스타급 여배우의 캐스팅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때문에 이번 <비몽>의 이나영이라는 배우의 캐스팅은 파격적이었다. 더불어 국내에서 많은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는 일본배우 오다기리 조가 있다. <야생동물 보호구역>의 드니 라방, <숨>의 장첸 등 외국 배우들의 캐스팅이 있었지만 스타성에서 놓고 보자면 비교가 되지 않는다. 이나영과 오다기리 조의 만남. 김기덕 영화에서 일종의 파격이라고 부를 만큼의 캐스팅이다.(조재현, 주진모, 재희, 하정우 등도 출연 김기덕 감독의 영화 출연 당시에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지 않았다.) 과연 김기덕이라는 괴팍한 감독과 이 두 명의 스타급 배우들의 앙상블이 어떻게 전개될지 영화가 개봉하기 전부터 많은 호기심을 자아냈던 것이 사실이다.

<비몽>은 4명의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이나영이 맡은 란, 오다기리 조가 맡은 진, 그리고 그들이 과거에 사랑했던 인물(박지아와 김태현)이다. 몽유병을 앓고 있는 란. 그녀는 그녀가 잠이 든 후 무슨 행동을 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녀가 하는 실제 하는 행동은 진이 꿈 속에서 저지르는 일이다. 진이 꿈 속에서 옛 연인을 찾아가면 란이 실제로 옛 남자를 찾아간다. 진에게는 꿈 속에서의 일이 란에게는 현실이 된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둘의 어색한 동거가 시작된다. 왜냐하면 진은 과거의 여자를 잊지 못하지만, 란은 과거의 남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한 명이 꿈 속에 있으면, 한 명은 반드시 현실에 있어야 한다. 이것이 둘이 지켜야 할 규칙이다. 잠을 이기기 위해 온갖 방법을 쓰고, 심지어 수갑까지 채우지만 결국 진은 꿈 속에서 과거의 여인을 죽인다. 곧 현실에서 몽유병 상태의 란은 실제 과거의 남자를 살해한다. 그래서 진은 지독하고 처절할 정도로 괴로운 현실에 갇히고, 란은 정신병원에서 죽음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

진이 꿈 속에서 하는 행동은 란이 몽유병 상태에서 실제 하는 행동이 된다. 때문에 진과 란은 동일한 인물이다. 동시에 꿈 속에서 진은 란의 옛 남자가 되고, 란은 진의 옛 여인이 된다. 두 명이 네 명도 되면서 동시에 한 명도 된다. 현실과 꿈,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인물 사이의 경계도 희미해진다. 고정되고 확실하던 개념들은 사라지고 남은 것은 무정형의 무언가 뿐이다. (란이 현실에서 옛 애인을 죽인 후 진의 옛 애인 조차 누가 그를 죽였는지 혼동한다.) 장미희가 연기하는 의사의 말처럼 흑과 백은 원래 한 가지 색이라는 말(黑白同色)처럼 극단에 서 있는 것들이 하나가 된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늘 강조하는 핵심이기도 하다. 또 하나의 해체는 삶과 죽음 사이 경계의 해체이다. 살해 후 진은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죽음과 같은 삶을 살고, 란은 정신병원 안에서 너무도 편안한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나비가 된 란의 죽음은 소멸이 아닌 또 다른 삶의 시작이 된다.  

이런 식의 해체는 이전 김기덕 영화(특히 최근작)에서도 많이 발견되는 작업이다. 그는 전작들을 통해 '사랑'이라는 고정된 개념과 이미지,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갇혀 있는 통속적인 의미(선인과 악인, 성녀와 창녀 등)들을 해체해왔다. 그리고 <시간>에서는 시간의 연속성을 해체했고, <숨>에서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해체했다. 이분법적이고 근대적인 분류 체계에 대한 반기. <비몽> 역시 그 연장선에서 김기덕의 색깔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 중의 하나이다. 특히 진과 란, 그리고 둘의 옛 연인이 모두 등장하는 갈대밭은 영화의 핵심이자, 김기덕 영화에서 앞으로도 계속 언급될 명장면이다. 꿈과 현실이 모호해지고 네 명의 인물 사이 경계가 폭발되면서 해체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그는 어설프게 해체된 개념들을 자기 식대로 다시 조합하지 않는다. 그냥 해체된 상태에서 자유롭게 노닐도록 두고 있다. 때문에 그의 영화에서 결말은 늘 열려 있고, 연속적이면서도 순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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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몽>은 화면 역시 이야기를 뒷받침해준다. 사실 김기덕은 미술을 공부한 감독답게 전작들에서도 남다른 영상미를 보여준 감독이었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것은 '한옥'. 가회동이나 삼청동 쯤으로 생각되는 지역을 주배경으로 촬영된 영화는 거의 모든 공간을 한옥으로 설정하고 있다. 심지어 경찰서 장면을 한옥에서 찍기 위해 종로구청을 경찰서로 꾸몄다고 한다. 혹자는 해외에서 더 인기가 높은 감독이 한국의 홍보 전략으로 한옥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하지만 감독은 겹겹이 쌓여 뭔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한옥의 이미지가 캐릭터들과 어울려 결정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 이어 전통적인 공간을 다시 한 번 무대로 등장한 한옥은 몽환적인 영화의 이미지와 맞아떨어지면서 극의 분위기를 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더불어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색깔이다. <색감의 선명한 대비와 조화.> 의상과 관련된 일을 하는 이나영의 집에서는 다양한 색깔의 옷감을 활용해서 진과 란의 감정을를 효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특히 진과 란이 한 명씩 번갈아 긴 천에 가려진 채 나누는 대화 장면은 마치 둘이 거울을 보고 이야기하는 듯한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타인에게 이야기하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극에서 주로 란은 백색과 진은 흑색과 어울린다. 둘이 입고 있는 의상도 그렇고, 각각 위치하고 있는 공간도 그렇다.(진의 어두운 집과 란의 밝은 정신병원)  이 역시 흑과 백은 동색이라는 영화 속 메시지와 잘 맞아 떨어진다. 결국 진과 란이 서로 상극에 서 있지만 하나라는 메타포를 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정리하자면 김기덕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충무로에서 어떤 장르나 흐름에 속하지 않고 스스로 자신의 공간을 튼튼하게 만들어 온 감독이다. 그의 영화언어와 구성 방식 그리고 메시지까지 적어도 한국영화판에서는 비교의 대상을 찾기 힘들다. 누구도 하지 않는 작업과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는 독보적이다. 그 독보적인 특징이 적을 만들어 왔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난 그의 작품들이 영화적으로 점점 세련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래서 난 그의 영화 작업이 앞으로도 변함없이 지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한국영화가 누릴 수 있는 호사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