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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도쿄! (Tokyo!, 2007)



뉴욕은 마틴 스콜세지, 우디 앨런,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뉴욕 스토리>(1989)라는 옴니버스 영화를 갖고 있고 파리는 <사랑해, 파리>(2006)라는 전세계 유명 감독들의 집단 애정 표현 선물세트를 갖고 있죠. 서울은 언제쯤 저런 영화를 가져보나 했었는데 이웃 나라 일본의 수도 도쿄가 먼저 선수를 쳤습니다. 그다지 큰 공통점은 없어보이는 세 명의 감독들, 미셸 공드리, 레오 까락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이 도쿄를 소재와 배경 삼아 만든 옴니버스 <도쿄!>는 그러나 뉴욕이나 파리의 경우와 달리 도쿄에 대한 일방적인 애정 표현 또는 아첨으로 일관하는 작품들이 아니더군요. 특히 레오 까락스의 <똥>(Merde)는 일본의 역사, 나아가 제국주의 국가들의 야만성에 대해 노골적으로 풍자하는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반면에 미셸 공드리의 <인테리어 디자인>과 봉준호의 <흔들리는 도쿄>는 작품의 배경을 다른 대도시 어디로 옮겨놓는다 하더라도 크게 어색하지 않을, 좀 더 보편적인 주제를 다룬 이야기라고 생각됩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도쿄!>의 첫번째 단편인 미셸 공드리 감독의 <인테리어 디자인>은 오사카에서 온 가난한 젊은 남녀가 도쿄에서 새롭게 정착해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영화 감독이 되고자 하는 남자 친구(카세 료)를 돕기 위해 운전을 하고 다른 친구(이토 아유미)의 단칸방에 빌붙어 지내면서 월세방을 알아보러 다니고 견인된 차에서 영화 상영을 위한 장비를 혼자 빼내오기도 합니다. 남자 친구가 만든 독특한 컨셉의 영화가 무사히 상영회를 갖게 되어 그간의 노고가 보답을 받아야 할 순간, 그녀(후지타니 아야코)는 깊은 소외감에 빠져듭니다. 특히 간밤에 들려온 집 주인 친구의 한 마디는 가슴 한 가운데에 치유될 수 없는 커다란 구멍을 만들어놓고 말지요. <인테리어 디자인>의 다른 제목을 찾는다면 <도쿄에서의 카프카적인 변신> 정도가 되지 않을까요. 급기야 하나의 나무 의자로 바뀌어가는 주인공의 모습은 과연 미셸 공드리라는 경탄을 내뱉게 만드는 놀라운 비주얼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관객들의 가슴을 후벼파는 아픔을 전달해줍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을 약간의 쓸모있는 존재로 여겨주는 다른 누군가에게로 갔다'고도 해석될 수 있는 결말이라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저는 <도쿄!>의 단편들 가운데 미셸 공드리의 이 작품이 가장 좋더군요.




레오 까락스 감독의 <똥>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도쿄 하수구의 광인(드니 라방) 이야기입니다. 언제부터 도쿄의 하수구에서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느닷없이 나타나 시민들을 괴롭히는 통에 아주 난리가 납니다. 사람들을 그저 깜짝 놀래키고 다니는 정도로만 끝날 줄 알았던 광인의 행동은 그의 손에 수류탄 상자를 들어오면서 대량 살상의 참극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죠. 도무지 개념이라곤 없는 듯한 광인은 결국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제국주의 시대의 광기를 상징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레오 까락스 감독은 오옴 진리교 사건과 같이 도쿄 시내에서 실제로 발생했었던 참극들과도 연관을 지으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일본과 도쿄에 관한 이미지를 비판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똥' 같은 과거의 유물을 제대로 안치워 놓고 도쿄 거리의 밑바닥(하수구)에 쌓아놓고들 사느냐는 얘기죠. 광인의 재판을 위해 프랑스에서 건너온 '광인과 거의 똑같은 풍모'의 변호사(장-프랑소와 발머)는 광인과 의사소통이 가능한 전세계 3명 밖에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설명이 붙습니다. 영화 속에는 더 이상 언급이 되지 않습니다만 나머지 2명 가운데 하나는 분명 미국인이 아닐까 싶네요. 레오 까락스의 영화도 오랜만이지만 드니 라방의 화끈한(?) 연기도 굉장히 반가웠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광인의 체포 이후의 과정은 약간 지루한 면이 없지 않더군요.




<괴물>(2006) 이후 오랜만에 보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인지라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었죠. 집 밖에 한 발자욱도 나가지 않고 외부 사람들과의 접촉을 단절한 채로 살아가는 11년차 히키코모리(카가와 테루유키)가 피자 배달부(아오이 유우)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히키코모리가 히키코모리를 만나기 위해" 주인공이 밖으로 나가면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흔들리는 도쿄>에서 지진은 혼자만의 세계에 갖힌 주인공이 소통을 갈망하게 되는 감정적 변화를 상징하는 동시에 히키코모리들이 밖으로 뛰쳐나오게 되는 조건이 되기도 합니다.

평범한 듯 하면서도 그 평범함을 비범한 연기로 보여주는 카가와 테루유키와 봉준호 감독의 강력한 디테일이 만나 오랜만에 보는 눈이 즐거운 영상을 만들어냈습니다. 여기에 이병우의 어쿠스틱 기타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면서 장면 마다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냅니다. 중간에 피자집 주인으로 다케나카 나오토가 출연해 역시나 짧고 굵은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것도 큰 기쁨이 되는 작품입니다. 세 편의 단편들 가운데에서 가장 긍정적이고 나름대로 해법까지 제시해주는 봉준호 감독의 작품은 그러나 마지막 '버튼이 눌려진' 한 순간에 갑자기 청소년 드라마로 바뀌어버리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합니다. 물론 이건 보는 이에 따라 굉장히 감동적일 수도 있을텐데요 아무튼 저는 그 알파펫 네 개로 이루어진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갑자기 맥이 픽 빠져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앞뒤가 잘 맞아떨어지는 설정이긴 했습니다만 저는 조금 다른 해법을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카가와 테루유키라는 배우를 국내에 소개시켜주었던 그 영화에 대한 오마주였을까요? <유레루>라 는 말이 영화 속에 두 번이나 나오더군요. 히키코모리의 세계에서 '유레루'하는 순간이란 혼란과 위험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희망의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물론 중요한 것은 다시 집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버튼'을 눌러주는 본인들의 의지이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