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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사람의 노래를 들어라 <미후네>


 


상처 받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 이들은 조금 더 불쌍하다. 안쓰럽다.

원래부터 불쌍한 사람, 살다보니 불행해진 사람, 한 순간에 불운이 닥쳐 온 사람,

일 분 일 초가 불안한 사람. <미후네>는 상처받은 이들이 부르는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 노래이다. 하모니가 빼어나지도, 멜로디가 유려하지도 않지만 진심과 사력을

다해 부르는 이들의 노래는 백조의 마지막 울림처럼 잔잔하고 깊은 감동을 준다.


도그마의 세 번째 작품, 넘버 3 <미후네>는 생소하게 들릴 수 밖에 없는 영화다.

라스 폰 트리에는 사실 작금의 영화광들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감독은 아니고

90년대 중반,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던 도그마의 열풍은 지금은 사어와도 같다.

예술 영화 팬들의 관심 역시 유럽 영화보다는 일본 영화 쪽에 향해 있으니

10여 년전의 경쾌하고 도발적이었던 서약은 디지털 영사기의 시대에는 올드해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허나 사실 도그마 선언의 진심이 심장에서 부터였기에 그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관객들은 물론 평단마저 깜짝 놀라게했던 토마스 빈터베르크의 <셀러브레이션>과

라스 폰 트리에의 <백치들>에 비하면 <미후네>는 요조숙녀다. 벌거벗고 날뛰지도 않고 그렇게 심하게 충격적이지도 않고 오히려 면면이 달콤하기도 한데다 유머러스까지 해서 도그마 영화들을 ‘시도’해보고자 ‘경험’해보고자 하는 관객들은 역순으로 <미후네> 먼저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철저한 자연광만을 사용하는 도그마 서약 덕택에 덴마크의 전원을 배경으로 삼는
<미후네>의 영상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영화 속 풍경을 얻게 되었다.

마치 <엘비라 마디간>의 영상이 오버랩 되듯 햇빛에 반짝이는 황금빛 들판과 탈색된 듯한 옥빛의 하늘은 보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숨겨진 유럽’ 덴마크의 전원을 정직하게 대하는 카메라는 그 덕에 온전히 아름다운 보석을 발견해 내었다. <미후네>는 그런 영상미가 주는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어쩌면 조금은 진부하고, 조금은 쎈 이야기를 부드럽게 다독이는 것도 한결같이 평온한 그자연 덕일지 모른다. 도시로부터의 모든 것에 지쳐있는 이들을 위한 송가와도 같은 <미후네>의 이야기는 지나간 과거의 아픔과 다가올 미래의 불안함 사이에 어정쩡하게 놓인 인간 군상들의 심리를 영상의 힘을 통해 위무하는 특별한 영화다.

길을 잃은 남자는 예기치 못한 곳에서 새로운 사랑을 발견하고, 꿈을 버린 여자는 삶을 포기하지 않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말을 잊은 남자 곁에는 말 보다 더 중요한 심장의 요동을 건넬 수 있는 이들이 자리를 잡고 ,삶을 속인 소년은 가장 어려운 숙제였던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한 학습을 받아들인다.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들로는 ‘볼썽사나운’ 이들은 대안 가족의 꼴을 갖춰가며 얼었던 서로의 마음을 부벼 녹인다. 10년 전의 영화이지만 전혀 오래된 느낌을 주지 않는 것은 그들의 관계가 시대 초월적인 보편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서이다. 낯선 누군가를 나의 곁에 둔다는 것, 내 일상의 소중한 부분으로 받아들인 다는 것에 대한 어려움과 행복함은 그 시대가 언제이냐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후네>는 도그마의 선언들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충격과 여운이 길게 남는 감동을 선사한다. 들고 찍기의 미덕은 우리네 일상을 들여다 보듯 친근함을 느끼게 하고, 서두르지 않는 이야기는 (긍정적 의미에서,기대와는 다르게) ‘제 멋대로’의 길을 간다.

한 치 앞을 예상하기 힘든 것이 인생이라면, <미후네>그런 우리의 인생을 닮아 있는 영화다. 때론 아름답고 대체로 서글프고, 가끔은 너무 박진감 있고, 그리고 곁에 누군가 있어서 참 다행인 우리의 삶. 가끔은 이렇게 인생을 닮아 있는 영화들이 정말 반갑고 아주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