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사과,할 순간들 <사과>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야. 거짓말

당신을 사랑해서 헤어지는 거야. 거짓말

당신을 절대로 잊지 못할 거야. 거짓말

진부한 클리셰가 멋지게 들릴 줄 알았다면 크나큰 오산이다.


그저

미안해. 한마디가 훨씬 더 아프지만 그만큼 담백하다.

화장은 하는 것보다 지우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처럼

사랑 역시 사랑에 빠지는 순간보다 이별해야 할 순간들이 더 중요하다.


강이관 감독의 <사과>는 ‘사랑의 습도’에 관한 영화다.

머리에 물기가 마르듯, 수건의 습기가 사라지듯 어느 순간 휑하니

건조해져버리는 관계의 퍽퍽함이 아프게 사무치는 ‘감성’이 아닌

‘감정’의 진화에 관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7년 동안이나 사랑했던 사람을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잊어야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그 사람의 존재 자체를 잊는 정도에서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마치 아무렇지 않게 놓여졌던 방 안의 사물들이 요동치듯이 함께한 추억들은

빠른 속도로 존재감을 획득하고 회오리처럼 오만가지 감정들을 점화시킨다.


나름 잘 나가는 커리어 우먼인 현정은 ‘공부’하는 남자친구를 애틋하게 아끼는

착한 연인이다. 물론 그녀의 남자 친구인 민석 역시 여자 친구의 부모님에게 ‘서방’

소리를 들으며 깍듯한 예우를 아끼지 않는 청년이다.

사랑에 대한 맹렬한 집착처럼 이별에 대한 지독한 부정 역시

마찬가지로 이성이 마비된 상태에서 이루어지기 마련이다.

‘나의 존재가 점점 없어지는 거 같아. 너와 있으면’ 이라는

사나운 말로 민석은 현정에게 일방적인 이별을 통보한다.

그것도 가족 여행 대신 택한 밀월 여행지, 제주도의 깍아지르는 듯한 절경 곁에서.

물론 이별한다고 죽지는 않는다. 죽을 만큼 힘들더라도 죽지 않는다. 그리워 사무쳐도 살아가기 마련이다. 누구나.  


<사과>는 아주 담담하고 현실적으로 이별한 그녀의 나날들을 따라간다.

아팠던 상처가 아무는 과정, 딱지 위에 고이는 눈물, 그리고 새로운 생채기가 남기는 알싸한 자욱들을 마치 터벅거리며 돌아오는 퇴근길의 발자욱 처럼 무심하고 쓸쓸한 눈길로 보듬는다.

새로운 사랑을 기다리는 것보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이 빠르다는 것은 ‘결혼의 과정’에 있어서 자명한 진리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하기에는 힘들어 보이지만, 함께 살 수는 있을 것 같은 남자 상훈을 택한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그 남자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라고 믿는 순간들은 순조롭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마저도 잊을 정도로.

결혼 행진곡에 진정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팡파레가 아니라 남의 더딘 스탭을 감내해야 할 배려와 사랑의 습도를 조절할 인내심이다.



우리의 주인공들 혹은 우리 자신들은 여전히 그것에 서툴다.

현정은 충분히 촉촉하거나 혹은 진심으로 강팍해서 자신의 사랑에 대한 의심의 고삐를 늦추지도 못한다.

물론 그것은 갑자기 떠나간 사랑 앞에 돌아오는 옛 남자 민석도 마찬가지다.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봐주는 옛 연인을 마다할 용기가 어느 여자에게 있으랴. 이 남자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참으로 약삭빠른 연인이다.

상훈 역시 누군가를 사랑하는 데에 자신이 없는 범인이다. 자신의 사랑은 말할 수 있지만 다른 이의 사랑을 듣기에는 겁이 많은 이 남자의 사랑은 지고지순했지만 지속적이지는 못했다.

 


엇갈린, 이들의 사랑과 사과는 그들 주위를 공기처럼 맴돈다. 때론 차갑게 때론 뜨겁게.

어쩌면 사랑을 하는 이들은 ‘사랑해’라는 말보다 ‘미안하다’는 진심을 더 맡이 내뱉어야 할지 모른다. 때론 자존심으로, 때론 이기심으로 차마 하지 못하는 누군가에 대한 사죄가 사랑의 다른 이름임을 말하는 영화,<사과>. 이미 타이밍을 놓쳐버린 옛 연인에게 물에 씻어 사과를 건네는 현정의 손이 아름다워 보였던 것은 비록 늦었더라도 사랑 앞에 조금 더 용기 있는 자의 말간 진심이어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