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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렛 미 인 (Låt Den Rätte Komma In, 2008)



어린 소년의 성장과 순수한 사랑, 벰파이어물의 판타지적 요소와 고어적 요소, 그리고 우아한 영상미와 배경 음악이 묘한 조화를 이루는 한 편의 잔혹 동화라고 할 수 있겠네요. 영화 시작부터 왠 육중한 음악으로 무게를 그리도 잡으시던지. 하긴 마을 사람들 입장에서는 끔찍한 참극인 셈이긴 하죠. 그러나 메인 테마로 사용되는 음악들은 상당히 서정적인 편이어서 영화의 지배적인 정서를 긴장과 공포가 아닌 따뜻함과 아련함으로 묶어줍니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년 오스칼(카레 헤레브란트)의 옆집으로 비슷한 또래의 소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와 노인이 이사를 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이 소녀가 흡혈귀라는 사실을 관객들에게 일찌감치 공개하면서 영화는 미스테리가 아닌 무척 평이한 서술식 서사 구조를 갖게 됩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끔찍한 사건 사고가 이어지지만 관객들을 인위적으로 긴장시키거나 깜짝 놀래키는 일이 없습니다. <렛 미 인>은 긴장과 공포를 대신하여 아름다운 영상과 배경 음악을 풍부하게 활용한 감정의 이입에 역점을 두고 있는 작품입니다. 전반적으로 환상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매우 성공적이라 할 수 있을텐데 개인적으로는 배경 음악의 사용을 조금 자제하면서 사실적인 톤을 강조했더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렛 미 인>은 작품 속에서 보여지는 것들 그대로 '허약 소년과 흡혈귀 소녀의 사랑 이야기'로만 보아도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긴 합니다만 영화 후반부에 나오는 대사 "난 너야. 잠시만이라도 내가 되어봐."의 의미와 소년의 시각에서 바라본 어른들, 특히 어머니와 별거 중인 아버지와 그의 친구를 보는 시선 등을 종합해볼 때 이엘리는 영화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오스칼이 스스로에게서 찾아낸 또 다른 자아라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물론 영화 속에는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훨씬 많습니다만) 굳이 어린 소년의 다중 성격 장애를 다룬 이야기라는 식으로 확대 해석을 넘어선 곡해를 할 필요야 없겠지만 절대적인 사랑과 악마적 요소를 겸비한 벰파이어의 이야기를 어린 소년의 성장 드라마에 접목시킨 상징성을 고려할 때 이것이 아주 의미없는 해석은 아니리란 생각을 합니다. 마을에 끔찍한 사건들을 일으킨 주인공이 이엘리이든 오스칼이든, 두 사람은 남들이 모르는 둘만의 비밀을 간직한 채 '기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며 끝나지 않습니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유년 시절의 상처와 내밀한 비밀들을 가슴에 묻어둔 채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모습처럼 보이거든요.

스웨덴의 설경처럼 백지장처럼 하얀 오스칼의 외모도 신비롭습니다만 소년인지 소녀인지 분간이 잘 안되는(둘이 사귄다고 할 때까지도 이 영화 동성애 코드까지 있네 했다가 영화가 이엘리를 소녀라고 계속 우기니까 뒤늦게 소녀라고 인정했습니다) 이엘리의 이국적인 모습도 <렛 미 인>을 무척 매혹적인 영화로 만들어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되네요. 본래 루마니아 태생인 드라큘라 백작의 후손인 듯, 길고 검은 곱슬머리를 한 이엘리의 눈빛은 파란 바닷빛이더군요. 흡혈귀이긴 하되 적당히 사실적인 캐릭터일 것으로 생각했는데 의외로 다른 벰파이어 영화에서 볼 수 있었던 강력한 초능력이나 제약 조건 따위가 그대로 재현되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상대방에 대해서 만큼은 절대적인 헌신을 쏟는다는 것이 벰파이어 캐릭터가 갖는 가장 강력한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지요. 어린 소녀 벰파이어이면서도 타고난 능력을 충분하게 발휘해준다는 장르적인 설정을 놓치지 않으면서도 전반적으로 서정적인 정서를 유지하고 전달하는 데에 성공하고 있다는 점, 그러니까 벰파이어 캐릭터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는 또 하나의 재해석이라는 점이 <렛 미 인>을 매우 인상적인 작품으로 만들어주는 요인이라 하겠습니다.





ps. 동화와 같은 영화 속 결말 이후의 오스칼과 이엘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리하여 둘은 행복했을까요, 불행해졌을까요? 그건 이엘리와 함께 이사를 왔던 죽은 노인(이엘리를 위해 피를 모으러 다니던 어설픈 연쇄살인범)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는 이엘리와 같은 벰파이어도 아니요, 그렇다고 이엘리와 친족 관계도 아닌 진정으로 미스테리한 인물이었습니다. 영화를 본 당일에는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더니 하루가 지나서야 감이 잡히네요. 그는 대략 50년 전에 이엘리를 만난 또 다른 소년이라고 생각됩니다. 바꿔 말하자면 오스칼과 이엘리의 미래는 곧 그 노인과 이엘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혹시나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신다는 분은 안계시겠죠? 이엘리의 나이는 12살이 아니라 최소 120살 이상입니다) 그들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는 본인들만이 알겠지요. 이엘리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자기 얼굴에 염산울 붓고 이엘리에게 자기 피를 제공하며 죽어가는 노인의 표정은 그렇다고 고통스럽거나 슬퍼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나니 <렛 미 인>이라는 영화는, 적어도 그 원작 만큼은 거의 완벽한 벰파이어물이겠구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