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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sicbox> 정치적 윤리와 인간의 윤리

<Musicbox> 정치적 윤리와 인간의 윤리

U.S.; 1990; 125min; 35mm; Color
Directing: Costa Gavras
Casting: Jessica Lange, Armin Mueller-Stahl, Frederic Foerrest

요즘 학교의 멀티미디어실을 자주 이용하고 있다. 순전히 DVD가 많아서... 평소 극장에서만 영화를 보는 습관 때문에 좋은 DVD들이 쌓여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도 외면했었는데, 우연찮게 문을 열었다가 어느덧 새버릇이 되어 버렸다. 이제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강의 준비하다가 자연스레 멀미실로 갈 길을 잡는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다. 화면도 작고 사운드도 부끄럽지만, 가격 부담 없고 자리만 잘 잡으면 분위기만큼은 웬만한 극장보다 훌륭하다. (너무 일찍 문을 닫는 것이 조금 아쉽긴 하지만) 보관실에는 따순 최근작도 많이 있지만 손이 가는 영화들은 고전영화나 국내 개봉하지 않는 작품들이다. 다시는 극장에서 만나보기 힘든 영화들... 오늘은 자료실에서 여기저기 손때를 묻히다가 1990년도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의 대표작 <뮤직박스 musicbox>를 선택했다. 평소 좋아라하는 감독이었고, 특히 올해 씨네큐브에서 뒤늦게 개봉했던 독일 영화 <더 걸>를 보고 난 뒤 더욱 궁금한 영화였기 때문이다. 두 영화는 독일과 미국이라는 다른 공간에서 만들어졌지만, 모두 전쟁 이전 독일 나치의 부끄러운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1990년에 세상의 빛을 본 영화라는 점등 많은 부분에서 닮아 있다. 그러고보니 1990년은 소련붕괴, 독일통일로 이어지는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세계를 들었다놨다하던 시기였다. 두 영화의 출생 모두 이런 시대적 분위기와 전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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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박스>는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이다. 전후 공산화 된 헝가리를 견디지 못하고 미국으로 건너와 선량한 미국의 시민이 된 아버지 마이크 라즐로와 그의 보호 아래 잘 나가는 여성 변호사로 성공한 딸 앤 탤버트. 서로를 끔찍히 아끼고 사랑하는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보기 좋은 부녀지간이다. 앤은 아버지가 헝가리에서 건너와 피난촌 생활을 거쳐 힘든 철공소의 노동자로 일하며 자신과 남동생을 헌신적으로 키웠다고 믿고 있다. 자신의 아들에게도 한없이 너그럽고 자상한 할아버지이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끔찍히 싫어하는 아버지가 가끔 막무가내의 행동을 해도 그는 아버지를 절대적으로 신뢰한다.

하지만 당시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이 안락한 가정을 뿌리채 뒤흔든다. 붕괴된 제국을 통해서 감춰진 자료들이 쏟아지고, 그 자료 어느 곳에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미국 시민이 된 아버지가 너무도 다른 얼굴로 있었던 것. 자료 속에서 마이크는 전쟁 기간 나치와 연결된 애로우크로스라는 헝가리 특수경찰이었고, 수많은 유태인과 양민을 잔혹하게 학살한 '전범'이었다. 그리고 공산화 된 헝가리에서 미국으로 넘어오며 추악한 자신의 과거를 묻어버리고 선량한 척 살아가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미국 이민국은 공개된 자료를 토대로 마이크를 이민법 위반 혐의로 헝가리로 추방할 것임을 알리면서 가족은 혼란에 휩싸인다.

앤과 가족은 자료를 신뢰하지 않는다. 분명 자료 속의 미쉬카는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확신하다. 그리고 이민국을 상대로 힘든 싸움을 시작한다. 증인들이 아버지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면서 재판은 점점 불리해지지만 그 때마다 앤은 주위의 도움을 받아 기가 막히게 상황을 뒤집는다. 하지만 그녀가 한 일은 마이크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님을 증명한 것이 아니라, 이민국이 제시한 증인과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것을 주장했을 뿐이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결국 그녀의 노력 덕분에 아버지는 증거불충분으로 무협의를 받고 그를 둘러싼 세간의 이목과 관심을 보기좋게 반전시킨다.

무협의 소식에 모두가 축제를 즐긴다. 기자들 앞에서 여전히 아버지는 당연한 결과에 만족한다는 듯 여유롭게 손주에게 말을 타는 법을 가르쳐준다. 동생은 신이 났고, 사돈은 국가를 상대로 명예훼손 협의로 소송을 준비할 것이라고 목을 높인다. 하지만 그 때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앤이 너무도 차가운 표정으로 나타난다. 그녀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증거들을 통해 결국 아버지 마이크가 미쉬카임이 드러난 것이다. 앤은 자신과 손주를 위해 아버지에게 스스로 모든 것을 밝히기를 부탁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책동이라는 주장만 고집한다. 그리고 앤은 결국 선택을 한다. 그것이 자신을 위한, 자신의 아이를 위한 그리고 결국 아버지를 위한 선택이라고 믿는다.

전당포에서 찾은 뮤직박스 속에서 발견한 사진들... 사진 속의 잔인한 경찰은 아버지였다. 뮤직박스에서 흘러나오는 경쾌한 음악과 달리 영화의 비극성이 정점에 닫는 순간이다.


코스타 가브라스 감독이 마이크의 원죄를 추적하는 과정은 집요할 정도로 철저하고 극적으로 펼쳐진다. 법정에서 증인들의 발언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고, 사실 확인을 위해 헝가리행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한 마이크가 원죄로부터 해방되는 시점에 보기 좋게 상황을 반전시키면서 극적 긴장감을 최대로 상승시킨다. 그리고 마이크 개인에서 가족, 사회, 국가로 무대를 점층적으로 확대시키면서 더욱 초조하게 결과를 기대하끔 유도한다. 마이크의 과거를 믿는 사람들과 반대로 마이크의 현재를 믿는 사람들의 대립이 이야기의 주된 대립축이지만 양쪽과 이해관계를 함께 하는 사람들이 복잡하게 엮이면서 갈등이 확대, 심화되는 것이다. 질문이 하나 떠오른다. 왜 감독은 현재를 선량하게 살아가는 한 인간의 추악한 과거를 이토록 철저하게 뿌리까지 파고드는 것일까?

이 질문을 보다 현실적으로 풀자면 과연 '정치적 윤리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윤리가 다를 수 있는가?'로 환언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감독의 전작을 살펴보면 그가 가지고 있는 방향성(orientation)이 어느 정도 짐작된다. 그를 영화감독으로 세상에 기억시킨 <Z>를 시작으로 <계엄령>, <미싱>, <배신의 계절> 등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공간을 달리하면서 끈질기게 정치적 비윤리성에 대한 의미심장한 질문들이었다. '화약고'라고 불릴만큼 불안정한 지역(그리스)에서 성장한 감독은 '정치적'이라는 명분을 갖고 자행되는 온갖 부조리한 것들이 어떻게 인간 개개인을 철저하게 파괴하는지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이 그의 영화들을 끈질기고 집요하고 철저하게 '악'을 추궁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 정치적 윤리라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정치에는 윤리와 도덕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감독에게는 비겁한 변명처럼 들릴 뿐이다. 때문에 영화 속에서 감독이 마이크를 바라보는 시선은 그의 선량한 현재가 아닌 그가 숨기고 있는 추악한 과거를 향하고 있다. 마이크가 아무리 공산주의를 적으로 삼아 지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해도, 자신의 기억 속에서는 이미 잊혀진 과거가 됐을지라도 여전히 그가 행한 정치적 부도덕한 행동은 '인간'으로서 풀고 넘어가야 할 숙제인 것이다. 40년이 넘도록 선량한 미국 시민으로 행세하며 살아온 마이크의 과거는 본인에게는 잊혀졌을지언정 피해자들에게는 상처로 남아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더욱 곪고 병들어왔기 때문이다. '정치'가 인간이 행한 비윤리적, 비도덕적 행동의 면죄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마이크는 자신의 과거가 사실로 밝혀진 순간에도 끝까지 자신을 옹호한다. 그것이 자신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인정하지 않는 진실은 오롯이 후대의 누군가 짊어지고 풀어야 할 짐으로 남게 된다. 그 대상이 가족이 된다면 비극은 더욱 비극이 된다. 어쩌면 마이크는 자신의 과거가 자신의 명예보다도 너무도 사랑하는 가족 앤과 마이키에게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진실을 외면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앤의 선택은 다르다. 추악한 진실이 언젠가 누군가가 풀고 넘어가야 할 숙제라면 지금 아버지, 자신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감당해야 한다고 믿는다. 아버지는 전범이 되고, 자신과 마이키는 전범의 자식이 된다. 앤에게 있어 그 선택은 지금은 아프지만 과거에 대한 속죄이자 미래를 위한 약속인 것이다.


1990년에 만들어진 <뮤직박스>는 그 해 이리 멘젤 감독의 <줄 위의 종달새>와 함께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1990년이라는 상황과 두 영화가 공동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것이 왠지 어색하지 않다. 현재를 반드시 과거에 대한 속죄의 시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뮤직박스>의 앤이 그러하듯 그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친일, 독재의 유산들이 길목길목마다 앞을 막아서고 있고, 이는 분명히 지금까지 우리가 책임을 방기한 대가이다. 아프다고 일부러 외면했던 상처들... 영화 속 앤의 선택이 2008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아프고 의미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