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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워낭소리> 그들이 사는 세상


<워낭소리> 그들이 사는 세상


Korea; 2008; 78mm; HD; Documentary
Director: 이충렬
Cast: 최원균, 이삼순, 늙은소, 젊은소, 어린소

추운 계절이다. 예년 겨울에 비하면 그렇게 추운 날씨도 아니다. 근데 이래저래 돌아가는 상황들이 몸와 마음을 더 움츠려들게 만든다. 뉴스와 신문을 보면서 내뱉는 게 겨울날 입김같지는 않다. 내 앞가림도 못하면서 세상 걱정하게 생겼냐고 스스로를 꾸짖어 보지만 말에 진심이 섞이지 않는다. 뭔가 답답하고 꽉 막힌 마음을 한 번에 녹여줄만한 그런 것이 생각난다. 손과 발이 얼어붙고 얼굴이 베일 것 같은 겨울, 포장마차에서 먹는 뜨거운 오뎅국물같은 그런 거 말이다. 문득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봤던 영화 한 편이 생각났다. 표를 구하지 못해 매표소 앞을 얼쩡거리다 "남는 표 아무거나 하나 주세요." 하고 본 영화였다. 아는 건 표에 적힌 제목 뿐이었다. 주인공이 누군지, 무슨 내용인지, 장르가 무엇인지 알아볼 겨를도 없이 표를 받자마자 시간에 쫓겨 상영관으로 뛰어 올라갔다. 그리고 상영관 앞에서 나눠주는 영화제목이 적힌 손수권을 받았다. 그것도 이유를 몰랐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서야 이유를 알았다. 상영관 곳곳에서 손수권이 담긴 비닐팩을 뜯는 소리가 들렸다. 곧 이어 훌쩍이는 소리와 함께...

<워낭소리>... 워낭소리는 그렇게 우연처럼 만났다. 얼마 전, 영화가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축년, 소의 해인만큼 독립영화치고는 꽤 여러 곳의 매체에서 소개되고 있었다. 그리고 개봉과 함께 최고의 관객점유율을 기록하며 '빵' 터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심 뿌듯했다. '그래도 내가 우연치고는 좋은 영화 골랐구나.' 정도의 만족감이었다. 왜 뜨거운 오뎅국물 어쩌구저쩌구 하다가 워낭소리가 생각났는지 모르지만, 그 때의 기억이 이 영화라면 그나마 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혼자 보는 영화가 익숙해졌지만 왠지 그러기 싫어 친구들을 불러냈다. 그냥 영화 끝나고 돌아가면 더 허전할 것 같았다. 있는대로 늘어지게 수다라도 한 판 떨어야지만 듣기 싫은 소리만 해대는 뉴스와 신문을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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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는 70대 노부부와 그들과 30년이 넘게 살아온 늙은 소의 마지막 1년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영화의 처음, 절에 가기 위해 겨울산을 오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걸음이 힘겹다. "소가 죽으니까 생각이 나니껴?' 할머니의 물음에 절을 마친 할아버지가 '그럼!' 하고 목소리를 높인다. 할아버지의 손에 들린 낡은 워낭도 주인을 그리워하는 듯 겨울공기만큼이나 맑은 소리를 낸다. 그리고 1년 전으로 돌아가 봄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집도 여느 시골집처럼 1년 농사를 시작하는 준비에 정신이 없다. 그 곁에 그들만큼이나 노한 소가 있다. 소가 보통 15년을 산다는데 이 소 나이가 사람으로 치면 불혹이다. 듬성듬성 빠진 털에 윤기가 없고, 뼈가 앙상하게 들어난 겉모습은 소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적지 않은 나이를 짐작하게 한다. 2~3년 등 따시고 배부르게 지내다 뼈와 살이 발라져 시장에 팔리는 소들에 비하면 천수를 누리는 셈이다. 근데 더 들여다보면 이 소의 팔자가 부러워할만큼 편한 것도 아니다. 할아버지 외양간에 처음 들어선 순간부터 소는 할아버지의 손이고, 발이였다. 고집스럽게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 때문에 지금까지 쉬는 날 없이 산으로, 들로, 논으로, 밭으로 쫓아다니며 일을 했다. 할머니 말처럼 말을 못해서 그렇지 일을 나갈 때마다 엄청 욕을 해댈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소는 묵묵히 할아버지를 태운 리어카를 끌고 평생을 오가던 길을 간다. 수의사가 살 날이 1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지만 마지막까지 소는 봄에는 못자리를 만들고, 가을엔 벼를 실고, 겨울엔 나무를 해나를 것이다.

그 만큼 할아버지도 소에게 끔찍하다. 농약 좀 치자는 할머니의 지청구에도 그러면 소가 먹을 게 없다고 단칼에 자른다. 사료 사다 먹이면 편할 것을 엄청 먹어대는 소를 위해 새벽처럼 일어나 쇠죽을 만들고, 땡볕에 일해도 할머니 배고픈 것보다 소가 배 곯는 게 걱정이다. 다리가 불편하고, 두통에 괴로워도 워낭소리가 들리면 소한테 뭔 일있나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린다. 이 소 한 마리로 농사지어 9남매 공부시키고 시집, 장가 다 보냈다고 하니 할아버지가 애쓰는 게 짐작 못할 바도 아니다. 죽어나는 건 할머니 뿐이다. 매일 아프다고 골골거리면서 일하러 다니는 것도 성가시고, 나이 먹고 편하게 농사질 수도 있는데 기계, 농약 다 마다하는 것도 못마땅하다. 더구나 할아버지가 허구한 날 소만 보고 있으니 울화는 더 치민다. 할머니 말처럼 '싱싱한 남자' 못 만난 게 한 일수도 있겠다. 그래도 말 뿐이지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할머니는 영감 없이 혼자 살 게 벌써 걱정이다. 자식 눈칫밥 먹고는 못 산다며, 따라 죽겠다는 말이 일일드라마에서 좋아 못 죽는 커플들의 빈 말처럼 들리지도 않는다. 외양간을 지키는 소한테도 그렇다. 30년 넘게 고생시킨 게 미안할 뿐이다. '너나 나나 영감 잘못 만나 고생이 많다.' 는 말처럼 어찌 보면 소는 할머니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벗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그리고 이름도 붙여주지 않은 소, 이렇게 셋은 30년이 넘게 그렇게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가족처럼 지내왔을 것이다. 마지막 1년도 다르지 않다. 셋은 마지막까지 평소처럼 하루하루를 보낸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하나... 외양간에 새주인이 들어왔다. 근데 새끼 낳고, 먹기만 잘 하지 일하는데는 영 젬병이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늙은소한테만 정이 간다.

   
겨울이 되면서 소의 기력은 바닥을 드러낸다. 그래도 할머니 말처럼 추운 겨울 노인네들 춥지 않도록 마당을 꽉차게 나무를 해놓고 소는 눈 감을 준비를 했다. 할아버지는 누워서 일어날지 모르는 소를 두고 '에이씨, 에이씨'를 반복하면서도 연신 눈을 훔친다. 알았으면서도 아직 오랜 친구를 보낼 준비가 안 된 듯 보인다. 그런 할아버지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소는 밭은 숨을 내쉰다. 평생을 달고 있던 코뚜레와 워낭이 떨어져 나가는 순간 소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더 이상 일어설 기력도 없는 자신을 보채며 연신 눈을 훔치는 할아버지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평생의 벗을 잃은 건 할아버지와 할머니 뿐이 아니었으리라.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위해 일을 하면서도 노부부만 남기고 가는 길이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평생 소가 일을 하러 다닌 밭 한 켠에 자리를 마련해준다. 마치 그게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을 위해 일만 해준 친구에 대한 예의이고, 고마움의 표시인 듯 말이다. <워낭소리>가 무엇보다 따뜻했던 이유는 이렇게 떠나는 자와 떠나보내는 자가 서로에 대해 전하는 배려와 예의 때문이었던 것 같다.

<워낭소리>는 한 마디로 따뜻하다. 감독이 카메라를 잡고 있는 손도 따뜻하고, 카메라의 시선도 따뜻하고, 소에 대한 할아버지의 마음도 따뜻하고, 할아버지에 대한 할머니의 푸념도 따뜻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살아있음이 따뜻하다. 아마도 이런 따뜻함 때문에 영화가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경상도 봉화의 한 마을에서 전해지는 그 온도는 많은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 곳곳을 비추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 소> 그들이 사는 세상의 '온도'가 무엇보다 그리웠다. 그리고 그들의 예의와 배려가 부러웠다. 추운 겨울 사람들이 편한 보일러 대신 촛불을 들었고, 공권력은 다시 그들을 향해 살수차로 물을 뿌렸다. 2009년의 시작에서 2008년의 그 뜨거움이 재현될 징후들이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대의정치의 정당성을 스스로 자진납세한 국회부터 출발선을 끊었고, '법'을 가장한 폭력으로 무장한 경찰이 가속도를 붙였다. 앞으로 2월 임시국회와 청와대의 인사, 경제대책들이 얼마나 추진력을 달아줄지가 관건이다.

문제는 소통이 전무하다는 것이다. 2008년 출범과 함께 새정부는 '소통의 정부'가 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면 그 약속이 민망하기까지 하다. 과연 배려와 예의가 없는 관계에서 소통이 이뤄질 수 있는지 묻고 싶다. 상대를 위한 따뜻한 온도 없이 이해가 가능한지 묻고 싶다. '법'은 지켜져야 하지만 그것이 유지해야 할 적정 온도와 조건들이 있다. 그것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법은 단지 사람들을 범법자로 만들 뿐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법을 지켜야 할 이유와 목적을 잃어버린다. 지금의 문제를 푸는 열쇠는 획기적인 정책, 눈부신 성장, 제 2의 기적 이런 거시적인 것이 아니다. 단지 평범한 우리들에 대한 높은 분들의 '예의'이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따뜻한 온도를 가진 배려다.

노희경이 쓰고, 표민수가 찍은 KBS의 <그들이 사는 세상>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끝까지 '우리들이 사는 세상'을 담기 위해 현장을 뛰어 다닌다. 또 그것이 드라마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하지만 막상 이 드라마가 끝날 때쯤 역으로 우리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 결국 우리가 사는 세상이었음을 알게 된다. 난 할아버지와 할머니, 소가 사는 세상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조금만 더 따뜻해지면 된다. 그리고 그 온도를 잃어버리지 않으면 된다. 어렵고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난 이것이 사람들이 다른 것도 아닌 '촛불'을 들고 있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워낭소리>의 훈훈함 때문이었는지 엉겨붙은 마음이 좀 풀린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약간의 길이 생겼다는 느낌에 마음이 놓이는 것 같다. 가끔은 책에서도 찾지 못하는 길을 전혀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얻기도 한다.


P.S. <스튜디오 느림보>는 이제 그 만의 톡특한 스타일의 다큐멘터리 제작 노하우를 가진 제작사가 된 것 같다. (배급에 있어서도 그렇다.) 독이 될 수도 있지만, 길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난 제작사의 전작인 <우리 학교>를 보면서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송환>이라는 입에 거품 물 정도의 마스터피스를 본 직후에 봐서 그런지 몰라도 난 아이들을 향하는 카메라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꼭 필요한 시도였고, 좋은 의도를 가진 좋은 영화임은 확실했지만 감정선을 건드려 뭔가 강요하는 듯한 화면이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어찌 보면 난 보다 칼 같은 카메라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워낭소리>를 보면서도 그런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솔직히 <워낭소리>는 극장판이라기보다 인간극장류의 TV다큐의 분위기가 더 많이 난다.) 하지만 <우리학교>와 <워낭소리>를 묶어서 보면 약간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스스로 너무 장르의 외연을 좁힐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하나의 장르 안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변주 역시 영화를 보는 재미니까 말이다. 앞으로도 <스튜디오 느림보>가 꾸준히 자신들만의 작품을 만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