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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 (The Assassination of Jesse James by the Coward Robert Ford, 2006)



베니스 영화제에서 브래드 피트에게 최우수 남자배우상인 볼피컵을 안겨주었던 작품이고 그외 크고 작은 많은 영화상들이 케이시 애플렉의 연기와 로저 데아킨스의 촬영에 주목했었던 작품입니다. 연출은 에릭 바나 주연의 <차퍼>(Chopper, 2000)를 연출했던 뉴질랜드 출신의 감독 앤드류 도미닉이더군요.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은 국내에서는 결국 개봉되지 못하고 DVD로 바로 출시된 영화입니다. 등장 인물 두 사람의 이름을 사용한 길고 긴 제목이 코미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사실은 영화의 내용을 그대로 함축하고 있는 매우 사실적인 제목이라 하겠습니다. 미국의 홍길동이라 할 수 있는 실존 인물 제시 제임스(브래드 피트)와 그를 암살했던 측근 로버트 포드(케이시 애플랙)의 이야기입니다만 신나는 열차 강도나 은행 강도 장면 보다는 내밀한 심리 묘사에 집중하고 있어 문학적인 기품마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매우 정적인 작품인데다가 러닝 타임마저 160분씩이나 되니 나 이거야 원 아무리 브래드 피트가 주연으로 나오는 작품이라 하더라도 영화가 이래가지고서야 도무지 극장에 내걸 엄두가 안났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순수한 작품의 완성도로만 본다면 <칠드런 오브 맨>(2006)과 함께 국내 관객들과 상영관에서 만나지 못하고 바로 DVD로 출시되어야 했던 안타까운 사례로 두고두고 손에 꼽을만 합니다.




버럭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취임을 하기로 했던 시각으로부터 불과 몇 시간 전에 봤던 탓인지, 제게는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에 등장하는 제시 제임스라는 인물이 미국 남부의 정서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인물로서 조지 부시 전 대통령으로 보이더군요. 시기적으로 보았을 때, 다가오는 미국 대선에서 거의 패배가 확실시 되고 있었던 공화당 측에서 누군가에게 '배신 행위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만든 영화가 아니냐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그 누군가란 미국 국민들 전체일 수도 있고 테러와의 전쟁 기간 몇 년 간 유지해온 친부시 성향을 거둬들인 언론이거나 헐리웃의 영화인들일 수도 있었겠죠. 아무튼 부시와 공화당을 선망하고 지지하다가 상황이 바뀌면서 변절하는 위치에 서고 있었던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시의 집권 초기나 재선 직후 때와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면서 드디어 미국 영화판에서도 노골적인 반부시 영화들이 쏟아져나오고 있던 시점에 이처럼 정반대의 입장에서 딴지를 걸어주는 영화 한 편이 있었다는 것이 매우 이채롭게 생각됩니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2008) 의 한국 여자 핸드볼팀이 결승전에서 졌다는 사실이나 <작전명 발키리>(2008)에서 히틀러 암살 공작이 실패하고 말았다는 사실처럼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은 그 결말이 관객들에게 이미 알려져 있는 상태에서 시작하는, 플롯의 구성상 매우 불리할 수 밖에 없는 위치에서 시작하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자연스럽게 제시 제임스가 단순히 죽느냐 사느냐가 아니라 그가 죽기 전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되었는가에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은 전체적으로 매우 사실적인 고증과 묘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변변한 액션 장면 하나 제대로 나오는 일이 없지만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닥 지루할 틈이 없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하필 왜 그 시점에 이런 영화가 만들어졌을까를 생각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맥락이라는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가 지나치게 저평가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어쩔 수 없이 매우 마이너한 입장에서 다뤄지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막연한 선망과 존경이 어떻게 실망과 두려움으로 변질되고, 급기야 배신으로 이어지게 되는지에 관한 촘촘한 이야기 정도로만 봐도 그닥 빠질 것은 없는 작품이긴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