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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알파 독 (Alpha Dog, 2006)



보려고 했던 영화들이 전부 시간이 맞질 않아 그야말로 꿩 대신 닭처럼 마지못해 집어든 영화였는데 아니 이게 왠 복권 당첨이란 말입니까. 이 정도 작품이면 문화인류학 보고서의 경지에 올랐던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영화들, 그러니까 <좋은 친구들>(1990)이나 <카지노>(1995)와 같은 범죄 드라마들과도 어느 정도 비교가 될만한 것 아닐까요. 그러고 보면 이 영화도 <과속스캔들> 만큼이나 '제목과 홍보가 안티'인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단역일 것이 분명한 브루스 윌리스를 포스터에 내세운데다가 이 영화는 무려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출연작이거든요. 그것도 2006년에 만들어져서 해외에서는 이미 DVD까지 출시된 지각 개봉작이니, 이런 낚시질에 어디 한 두 번 당해봤어야 말이죠. 그나마 한번 기대를 걸어보게 만드는 것은 카사베츠라는 감독의 이름이었는데요, 고명하신 존 카사베츠 감독님의 아들이시거나 말거나 사실은 닉 카사베츠 감독의 연출작이라고는 아직까지 본 일이 없어서 이거 잘못하면 크게 실망만 하고 돌아올 가능성이 높은 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영화 관객은 언제나 자신의 기대치가 잘 맞아 떨어지는 경우 보다 어찌 되었건 영화가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는 경우에 훨씬 더 큰 기쁨을 얻습니다. <알파 독>은 확실히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년 전에 개봉했던 <브릭>(2005) 은 범죄 드라마라고는 해도 확실히 오락성에 충실한 작품이었습니다. 고등학생들이 펼치는 느와르라니, 심각한 척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웃음을 유도하는 장면들도 많았고 그랬던 만큼 잔인한 장면들조차 그리 잔인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알파 독>은 <브릭> 만큼이나 나이 어린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사실적인 톤으로 그려지는 영화더군요. 네, <브릭>의 현실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이 <알파 독>입니다. 에딘버러를 배경으로 했던 <트레인스포팅>(1996)과도 여러가지 면에서 비교가 될만 합니다만 <알파 독>은 역시나 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경쾌한 낙관 보다는 씁쓸한 뒷맛과 함께 현실적인 교훈을 남겨주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 영화가 실화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봤습니다. 첫 장면부터 중간중간에 사건 발생 시점으로부터 몇 년 지난 시점의 인터뷰 장면들이 삽입되고, 특히 헤드카피로 소개된 그 '납치'가 시작되면서 증인들의 이름과 숫자가 자막으로 표시되고 있었습니다만 어디까지나 사건 파일 분위기를 내기 위한 장치라고만 생각했지 이 내용 자체가 정말 실화라는 생각은 못하고 봤습니다. 영화의 포스터를 한번 보세요. 충격 납치 실화! 라는 헤드카피가 있긴 하지만 '납치'라는 단어만 눈에 들어올 뿐 '실화'라는 말은 거의 기억에 남지를 않거든요. 포스터에 대문짝만하게 씌여있음에도 실화일거라는 생각을 못하다니. 실화가 아니었음에도 굉장히 실화처럼 느껴졌던 <8 마일>(2002)과는 정반대의 경우라고 하겠습니다.

영화가 실화냐 아니냐는 것은, 그리고 그 사실을 미리 알고 보느냐 모르고 보느냐 하는 것은 작품 감상에 있어서 의외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할 수가 있습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는 아무래도 영화화를 하게 된 이유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락적인 재미 이외에 이 영화가 만들어졌어야 하는 이유, 그와 아울러 내가 이 영화를 굳이 봐야만 하는 이유를 더 찾게 된다는 것이죠. 그리고 실화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보면 그렇지 않을 때에 비해서 좀 더 몰입된 상태에서 영화를 보게 됩니다.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하니 더 열받거나 더 감동을 받거나 하는 것이죠. 저는 우연찮게 <작전명 발키리>와 <체인질링>에 이어 <알파 독>까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개봉 영화들만 내리 3편을 보게 되었는데요. 기술적인 만듬새에 있어서는 <작전명 발키리>가 가장 우수했지만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게 된 이유에 대해 가장 흔쾌히 동의할 수 있었던 작품은 단연 <알파 독>이었습니다.




영화 초반을 휘어잡는 것은 단연 제이크(벤 포스터)의 광기 어린 캐릭터입니다. 처음엔 재혼해서 따로 살고 있는 생부에게서 푼 돈이나 꾸려고 하는 마약쟁이 정도인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난폭하기로는 감히 따라올 자가 없는 진정한 꼴통이십니다. 약간 과장된 면이 없지는 않지만 그저 바라만 보아도 황홀해지는 이런 정도의 성격파 연기는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습니다. 벤 포스터의 연기는 흡사 잭 니콜슨의 젊은 시절 같기도 하고 <아메리칸 히스토리 X>(1998)에서의 에드워드 노튼을 연상케도 합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경우 다른 작품에서는 모르겠습니다만 <알파 독>에서의 연기 만큼은 충분히 합격점을 주고도 남습니다. 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연기를 보면서 가수로서의 이미지를 완전히 잊어버리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지만요. 영화의 후반부로 가면서 감정적인 흐름의 중심에 서게 되는 프랭키(저스틴 팀버레이크)의 역할이 꽤 중요해지는데 다행히 이를 잘 소화해내고 있더군요.

영화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하는 것은 등장 인물들을 바라보는 카메라의 동정어린 시선입니다. <알파 독>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아직 청소년이거나 갓 스무 살 정도의 나이인데, 이들을 거의 버려두다시피 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일관되게 묘사되면서 영화의 주제 의식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습니다. <알파 독>을 보는 관객으로서의 성공 포인트는 이런 감독의 시선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화의 결말이 어느 정도 암시되고 있을 때 즈음 잭(안톤 옐친)을 위한 파티가 벌어지고, 그 행복했던 순간들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결국 어린 시절의 추억 만들기와 돌이킬 수 없는 끔직한 비극 사이의 간극이 매우 얇았더라는 사실입니다. 거칠고 위험해보이기는 해도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실수만 저지르지 않는다면 결국 성장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냐는 것이죠. 문제는 그런 치명적인 실수를 제어해주지 못하는 환경이더라는 겁니다.




<알파 독>은 실화에서 끌어온 많은 젊은 등장 인물들이 이끌어가는 이야기이지만 그들의 부모 세대에게까지 과감히 시선을 확장시키고 있는 작품입니다. 현상과 문제점에 대한 나름의 진단까지 내리고 있는 것이죠. 특히 자니(에밀 허쉬)의 아버지 소니(브루스 윌리스)의 인터뷰로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연출자의 의도는 명약관화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알파 독>은 사건의 비극성과 꽃다운 시절의 아름다움을 대비시킴으로써 정서적인 몰입도를 높이는데 성공하고 있는 각색과 연출도 훌륭했지만(<작전명 발키리>와 비교했을 때 좋았던 점) 작위적인 메시지 전달을 최대한 피하면서 실화를 통해 관객들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주고 있다는 점(선전 선동 영화를 방불케했던 <체인질링> 보다 나았던 점)에서도 '이 정도면 정말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선을 오랜만에 넘겨준 작품이 되었습니다.

2006년작인 <알파 독>은 젊은 배우들을 위한 훌륭한 레퍼런스 영화가 되었더군요. 물론 <알파 독> 출연 이전부터 이미 '알아본 떡잎들'이긴 했습니다만 그 이후의 출연작들이 다들 화려합니다. <알파 독> 이후 에밀 허쉬는 <스피드 레이서>,  안톤 옐친은 <찰리 바틀렛>, 그리고 아만다 세이프리드는 <맘마 미아!>에서 주연을 했지요. 그외 벤 포스터는 <3:10 투 유마>에 서 인상적인 조연을 했고, 저스틴 팀버레이크도 <슈렉 3>의 더빙에 참여하는 등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나름대로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뒤늦게 나마 국내 개봉이 되어서 무척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좋은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포털 사이트에서 <알파 독>에 터무니 없이 낮은 평점과 악플을 달고 계신 분들은 대체 어느 영화의 홍보를 맡고 계신 알바분들이신지 궁금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