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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배창호 특별전] 조금 늦은, 감독님의 영화들에 바치는 고마움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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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창호 감독님의 특별전이 끝난 지 1주일이 지났다. 지난 주 일요일에 마지막으로 영화를 보고 감독님과의 대화 시간에 참여한 뒤 꼭 감독님의 영화에 대한 글을 한 번 더 쓰려고 마음먹었는데 여러 이유로 이렇게 늦어지고 말았다. 무언가 대단한 글이어야만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머릿속의 생각들을 쉽게 정리하지 못한 게 하나의 이유고, 그 와중에 예비군 훈련을 가는 바람에 그나마 조금 정리했던 생각들마저도 순식간에 잊히고 만 것이 또 다른 이유다(군대란 무서운 것이다. 단지 2박3일을 지냈을 뿐인데도 마치 2년 동안 군생활을 한 것 마냥 사람의 머리를 굳게 만드니까 말이다). 그냥 포기할까 생각도 했는데, 역시 그러기에는 아쉬움이 큰 특별전이었기에 더 늦어지기 전에 결국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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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게 된 데에는 무엇보다도 감독님이 2004년에 만든 최신작 <길>의 영향이 컸다. 지난 주 일요일에 이번 특별전의 마지막 영화로 본 영화다. 70년대를 배경으로 장터를 돌아다니는 어느 대장장이의 이야기를 그린 이 영화에서 감독님은 직접 주인공인 태석을 연기하며 영화에 등장하고 있다. 영화의 처음, 어느 장터에서 열심히 망치질을 하는 태석에게 누군가가 요즘에는 기계로 연장을 만드는데 왜 힘들게 손으로 만드느냐고 말한다. 그 말에 태석은 기계로 만든 연장과 조상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대로 손으로 만든 연장이 어디 같겠냐며 버럭 화를 낸다. 그 순간 나는 어쩌면 저 대사는 영화 밖의 감독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 속 태석을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꼬방동네 사람들>을 보고 나서 쓴 글에서도 밝혔듯이 나는 감독님의 영화에서 자꾸 그 속에 담긴 시대의 분위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꼬방동네 사람들>에만 해당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막상 다른 작품에서도 나는 여전히 같은 태도로 다른 영화들을 보고 있었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감독님의 영화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길>에는 옛것에 대한 향수가 가득 담겨져 있다. 장터를 정처 없이 떠도는 대장장이의 이야기에서는 김동리의 <역마>,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한국의 전통적인 정서를 담은 소설들을 떠올리게 하고, 70년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재현한 장터나 버스 터미널의 풍경들에서도 잊고 있던 옛 기억들을 다시 떠올릴 때의 정겨움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러나 <길>은 ‘그땐 그랬지’라며 지나간 시절을 좋았던 일만 가득했던 시절로 낭만화하지 않는다. 길 위에서 태석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간다는 신영을 만나는데, 잠시 추위를 피하기 위해 들어간 빈집에서 신영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너무 힘들어서 잠이 들면 작업반장이 허벅지를 바늘로 찌르며 잠을 깨웠어요.” 노동자로서 힘들게 살고 있는 그녀의 이야기는 새삼 70년대라는 시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노동자들은 힘든 삶을 살았고, 개발이라는 논리 아래 옛것들을 마구잡이로 뜯어 고치던 시절. 물론 70년대를 살지 않았던 사람들이라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알고 있는 것과 느끼는 것은 다른 것이다. 감독님은 영화를 통해 끊임없이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쉽게 잊게 되는 지나간 시대를 직접 느끼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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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도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역시 영화에 담긴 시대의 분위기였다. 1987년에 나온 한국영화들 중 그 해 가장 재밌는 영화와 가장 슬픈 영화에 동시에 뽑혔다는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어느 소심한 남자 영민(안성기)이 한없이 도도한 여자 혜린(황신혜)을 만나 지고지순한 사랑을 이루어 가는 전형적인 멜로영화이다.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누군가 지적했든 정형화된 캐릭터와 전형적인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이 영화가 다른 멜로영화들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영민과 혜린의 사랑 이야기 속에 80년대라는 시대의 분위기가 알게 모르게 녹아있다는 것이다. 영민의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이제는 대형마트의 열풍 속에 쉽게 찾아보기 힘들게 된 재래시장의 풍경과, 여자 주인공인 혜린이 살고 있는 고층 아파트의 풍경이 전해주는 묘한 대비는 고도성장을 향해 달려가는 그 시절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듯하다. 이제는 세상을 향해 나가야 한다며 종합상사에 취직을 하라는 영민의 아버지(최불암)의 이야기와, 성공을 위해 미국으로 떠나는 혜린의 모습이 묘하게 겹쳐질 때는 과연 둘의 사랑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비단 둘만의 문제인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경제 발전으로 누구나 맘만 먹으면 쉽게 외국으로 떠날 수 있고, 통신과 인터넷의 발전으로 아무리 먼 곳에 있어도 서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성공을 위해 외국으로 떠난 여자와 그런 여자를 잊지 못해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있을 수 있을까? <기쁜 우리 젊은 날>은 온전히 80년대를 위한 영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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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쁜 우리 젊은 날>에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혜린을 향한 영민의 변하지 않는 사랑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정성 때문일 것이다. 감독님의 영화의 감동은 세월이 흘러도 변해가지 않는 무언가에서 나온다. 그것은 정(情)이기도 하고, 사랑이기도 하며, 인간에 대한 한없이 긍정적인 태도이기도 하다. <러브 스토리>에서도 그것은 그대로 반복된다. 감독님과 감독님의 부인(김유미)이 직접 영화에 남녀 주인공으로 출연한 <러브 스토리>에서 돋보이는 것은 꾸밈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두 사람 사이의 사랑 이야기다.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호감을 가진 두 사람은 그 감정만을 가지고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에는 흔히들 말하는 ‘작업’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자가 먹다 남은 음식을 남자가 게걸스럽게 먹을 때도 남자를 향한 여자의 사랑은 변하지 않고, 서로 성격이 맞지 않아 다툴 때에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사랑만을 믿으며 계속해서 관계를 유지해간다. 서로의 마음을 숨긴 채 상대방의 마음을 떠보기 위해 밀고 당기기를 하는 요즘 같은 시대에 <러브 스토리>는 비현실적이다 못해 판타지처럼 보이기까지 할 정도다. 그러나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사람들이 영화가 너무 예쁘고 귀엽다는 말을 했을 때, 감독님은 반대로 이 영화를 만들 때 헐리우드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지닌 판타지적인 사랑을 배제하고 오히려 가장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만들려고 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나는 어쩌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잘못 보았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다음에 감독님이 덧붙인 말이 더 인상에 남았다. 사랑의 짜릿함에 익숙한 세대에게 이 영화가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그 짜릿함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막 사랑이 시작했을 때 생겨나는 짜릿함보다는 그 이후의 관계를 유지하는 감정을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가장 본질적인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계신 건 아닐까 싶었다. 그렇기 때문에 <러브 스토리>야말로 진정한 로맨스 영화일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사랑이 판타지가 되어버린 시대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다.

감독님의 특별전을 보는 동안 엉뚱하게도 뉴욕에 있는 플랫아이언 빌딩 생각이 났다. 맨해튼의 23번 스트리트와 핍스 애비뉴가 만나는 곳에 있는, 삼각형의 모습이 마치 다리미(flatiron)를 닮았다 하여 그런 이름이 붙여진 이 빌딩은 1902년에 완공된, 뉴욕을 대표하는 여러 건물들 중 하나다. 뉴욕에는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건물들이 곳곳에 남아 그 시절을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떻게 된 일인지 자꾸만 지나간 것을 없애고 새로운 것을 만들려고 한다. 얼마 전 공원을 만든다면서 철거된 동대문 운동장이 그렇고, 종로 한편에서 오랜 세월을 지켜온 세운상가도 곧 추억 속의 건물로 사라진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쉽게 옛것을 잊고 새로운 것만을 좇는다. 그렇기 때문에 감독님의 영화를 지금 다시 보는 것이 더욱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길>의 상영 이후 있었던 마지막 관객과의 대화에서 감독님은 지나간 시절을 웃음거리로만 생각하지 않고 애정을 갖고 대해야 한다는(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지만) 말씀을 하셨다. 그 순간 지난 며칠 동안 자꾸만 특별전을 가게 만든 그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감독님의 새로운 작품을 빠른 시일 내에 만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에도 이번처럼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감독님의 영화를 찾았으면 좋겠다.

[덧1] 이번에 본 또 다른 영화, <황진이>와 <꿈>, <정>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었다. <정>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 위에서 한 이야기를 반복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해서 아쉽지만 제외하게 되었다. 그리고 <황진이>와 <꿈>은 역시 미학적인 접근을 이야기해야만 하는 영화인데, 아무래도 이번 특별전에서 느낀 것은 감독님의 미학적인 태도보다는 세상을 향한 태도였기 때문에 굳이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또 개인적으로는 <황진이>에서 보여준 미학적인 시도를 대중영화의 틀 속에서 재시도한 <기쁜 우리 젊은 날>이 오히려 더 돋보인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가장 아쉬운 것은 17편의 감독님의 영화 중 절반도 안 되는 7편 밖에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감독님 영화들을 모은 DVD 박스세트라도 나와야 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도해본다.

[덧2] 이번 특별전을 위해 윤성호 감독과 양해훈 감독이 감독님에게 바치는 (정확히는 <러브 스토리>에 바치는) 두 편의 단편 영화를 만들었다. 카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