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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더 레슬러 (The Wrestler, 2008)



아직 개봉 전인 작품입니다만 "아카데미의 보석들" 특별전을 통해 미리 감상했습니다. <더 레슬러>는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에 남우주연상(미키 루크)과 여우조연상(마리사 토메이), 2개 부문의 후보로 지명되었다고 하더군요.

작년 베니스 영화제에 출품되어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바 있는 <더 레슬러>는 80년대 최고의 미남 배우였던 미키 루크의 실제 인생 역정과 빼어닮은 내용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었던 작품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미키 루크의 80년대 출연작들을 무척 좋아해서 열심히 비디오 가게들을 뒤져 찾아보기까지 했던 추억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성형 후유증으로 얼굴이 많이 망가지고 그 때문에 변변한 배역을 맡을 수도 없게 되면서 관객 입장에서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는데 <씬 시티>(2005) 에서의 역할 이후 이렇게 <더 레슬러>라는 작품으로 당당히 재기하고 있는 미키 루크의 모습을 보니 그야말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아카데미 상을 받건 못받건 <더 레슬러>로 돌아온 미키 루크는 이미 감격적인 인생 드라마의 주인공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더이상의 신파극은 없다'고 할 정도로 전형적입니다. 비유하자면 <반칙왕> 정도의 스포츠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보기 시작했는데 끝까지 보고나니 <파이란>이었더라고나 할까요. 그러나 8mm 캠코더로 찍은 듯한 거친 화면이 현장감과 사실성을 더해주면서 관객들을 50대 나이의 '생계형' 프로레슬러의 삶 속으로 끌어당깁니다. 오프닝 크리딧에서부터 깔리기 시작한 80년대 헤비메탈 넘버들은 <더 레슬러>의 가장 좋았던 시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또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있는) 주인공의 마지막 안식처이기도 합니다. 주인공 랜디 램(미키 루크)이 개 버릇 남 못주고 결국 패망의 길로 가는 레이건 시대의 미국을 상징한다고 봐도 무난한 해석이 되겠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이런 한가로운 딴생각을 할 만큼 지루한 영화는 아닙니다.

랜디 램의 주변 인물들로 마이사 토메이와 에반 레이첼 우드가 출연했는데 워낙에 상투적인 캐릭터들임에도 불구하고 몰입을 방해하지 않는 훌륭한 연기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은 <레퀴엠>(2000)에서 제니퍼 코넬리를 완전히 망가뜨려 놓더니 이번 작품에서도 나름대로 곱게 늙는 중이던 마리사 토메이에게 험한 연기를 주문했더군요. 덕분에 두번째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 지명을 받긴 했지만요. 그외 등장하는 동료 레슬러들이나 조단역 배우들도 많지만 <더 레슬러>는 역시 미키 루크의 원톱 영화입니다. 카메라가 처음부터 끝까지 미키 루크가 연기하는 랜디 램의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닌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고 그러다 보면 어디선가 다큐멘터리용 나레이션이 들려올 것만 같습니다.




미키 루크는 이 영화를 위해 체중도 꽤 불렸었다고 하는 것 같더군요. 랜디 램의 마지막 시합에서 나온 건스 앤 로지즈의 Sweet Child O'Mine은 미키 루크가 권투선수로서 링 위에 설 때마다 사용했었던 바로 그 곡이라고 합니다. 이래저래 처음부터 미키 루크의 캐스팅을 염두에 두고 쓴 시나리오라는 생각도 들고 그랬던 만큼 배우와 캐릭터의 싱크로율이 매우 높은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최고의 대사를 꼽으라면 역시 "80년대 곡들이 정말 좋았는데 그 놈의 커트 코베인 자식이 다 망쳐놨어"가 아닐까요. 그 자체로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었을 정도로 굉장히 재미있는 농담이기도 했지만 시대나 상황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사는 랜디 램의 캐릭터, 아니 우리네 인생살이를 잘 드러내 주는 대목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더 레슬러>의 마지막 장면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결말이긴 합니다만 마치 활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극중에 나오는 노래 가사이기도 하죠) 관객들의 가슴으로 날아와서 박히는 맛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골든글로브에서 최우수 주제가상을 받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동명 타이틀곡이 흐르죠. 연출자의 재능이 제 역할을 하게 되는 건 결국 전체적인 스타일링과 함께 이런 끝마무리에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디테일을 꼼꼼하게 살리고 안정적인 호흡을 유지하는 일은 기본기에 해당하는 일이겠지요.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재능과 미키 루크의 근성이 만나 빚어낸 <더 레슬러>는 관객들의 지성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감성을 흔들어 놓기에는 충분한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설령 미키 루크에 관해 전혀 몰랐던 관객이 보더라도 <더 레슬러>가 전달하려는 바를 놓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