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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무샤 (影武者, 1980)

'카게무샤'는 전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지만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카와 이에야쓰 같은 시대를 풍미한 영주의 영웅적 모습을 그리기 보다는 다케다 신겐의 대역으로 일생을 살아온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전쟁의 비극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다. 교토 쟁탈을 위해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카와 이에야쓰 그리고 다케다 신겐이 대립 중이던 때, 다케다 신겐은 적군의 성에서 들려오는 피리 소리를 듣기 위해 진지에 있던 중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하게 된다. 적군에게 총을 맞은 후 죽음에 직면하게 된 신겐은 자신의 중신들에게 마지막 유언을 내린다. 앞으로 3년간 자신의 죽음을 숨겨 자신의 가문을 보전토록 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다케다 신겐을 두려워하던 노부나가와 이에야쓰는 신겐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자 세작을 보내 그의 죽음을 확인하도록 지시한다.

신겐이 총상의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이하자 신겐의 중신들은 그의 죽음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게 된다. 이 때 신겐의 동생인 노부카도는 그림자 무사로 쓰기 위해 자신이 숨기고 있었던 한 남자를 소개한다. 신겐의 중신들은 대역을 보고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고 만다. 대역의 겉모습은 마치 신겐이 살아 돌아온 것처럼 너무나 닮아있던 것이다. 하지만 본래 도둑이었던 대역은 완고한 성격을 가진 남자다. 신겐의 중신들이 재물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완고하게 신겐의 그림자 무사 역할을 거부한다. 하지만 우연히 독 안에 든 신겐의 시체를 발견한 도둑은 영주인 신겐이 죽은 사실을 알게 된다. 신겐의 대역을 거부한 체 중신들을 몰래 따라다니던 도둑은 노부나가와 이에야쓰의 세작들이 신겐의 죽음을 염탐하는 것을 엿듣게 된다. 신겐의 죽음을 틈타 두 영주의 침입이 있을 것을 두려워한 도둑은 노부카도를 찾아가 아무 조건 없이 신겐의 그림자 무사가 되겠다고 자청한다.

신겐의 그림자 무사가 된 도둑은 마치 찰스 디킨즈의 '왕자와 거지' 속에서 거지가 왕자의 삶을 흉내내는 것처럼 영주의 생활방식을 재현하게 된다. 산처럼 묵직하고 근엄한 신겐과 달리 도둑은 경박한 면이 있을 정도로 제멋대로의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신겐의 수행원과 노부카도의 지시대로 신겐의 삶을 흉내내던 도둑은 점점 그와 유사할 정도로 신겐의 모습을 갖추어 간다. 그러나 도둑은 실체가 없는 그림자에 불과한 존재이다. 진상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군주로 군림하지만 그는 언제나 노부카도와 수행원들의 눈치를 보며 그들의 지시대로 따르는 허수아비같은 존재이다. 도둑의 뒤로 비쳐지는 그림자의 모습은 그의 허울뿐인 모습을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영화는 도둑의 내면에서도 그림자가 실체를 대신해 영주의 자리를 차지한 것에 죄책감과 두려움이 있음을 꿈을 통해 보여준다. 마치 불교 속의 지옥같은 공간에서 무사 복장을 한 신겐을 마주친 후 두려움에 떨면서 도망치는 도둑의 모습은 실체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인간의 내면을 잘 드러낸다.


도둑이 신겐의 역할을 잘 해나갈수록 내부에선 그의 존재에 대해 껄끄러워 하기 시작한다. 신겐의 아들인 카츠요리는 아버지가 후계자를 자신이 아닌 카츠요리의 아들에게 권세를 물려준 사실에 대해 분노를 삼키는 인물이다. 자신의 아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도 모잘라 그림자 무사로 굴러 들어온 인물이 아버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자 그는 어떻게든지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켜야 한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힌다. 노부나가가 신겐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군대를 투입하자 카츠요리는 이에 대응해서 싸울 것을 주장한다. 노부카도의 제안대로 노부나가에게 대응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로 봤던 중신들은 그의 발언에 당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도둑은 마치 신겐이 환생한 것처럼 근엄하게 '산은 움직이지 않는 법이다'라고 대응하며 위기를 재치있게 넘긴다. 도둑의 근엄한 대응은 카츠요리에게는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긴다.

신겐이 유언을 통해 3년 동안 가문을 보전하라고 지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카츠요리는 아버지가 정복하지 못한 요새를 정복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고 한다. 무리하게 군대를 출진한 카츠요리를 돕기 위해 중신들은 그림자 무사를 내세워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영화는 화려한 영상을 통해 전쟁의 광경을 묘사하기 보다는 어둑한 밤의 광경 속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군인들의 모습을 통해 비참한 전쟁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어가는지 조차 모른체 자리에 앉아 신겐의 모습을 흉내내는 도둑은 그의 눈을 통해 전쟁의 끔찍한 광경을 목격한다. 도둑을 보호하기 위해 어디선가 날라오는 화살과 총을 막아내는 병사들의 모습은 군주를 위해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해야 했던 병사들의 비참한 죽음을 드러내는 듯하다.


전쟁을 마친 뒤 도둑은 이제 신겐과 다름없을 정도로 영주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3년이란 기간이 지나자 중신들은 그의 존재에 대해 껄끄러워 하기 시작한다. 실체가 없으면 그림자도 없듯이 이제 실체를 유지할 필요 없어진 그들로서는 주군의 자리에 있는 그림자 무사를 좋게 볼리가 없을 것이다. 도둑처럼 카케무샤를 경험해본 노부카도만이 쓸모가 없어지면 언젠가 버려질 도둑의 비참한 운명에 대해 안타까워할 뿐이다. 결국 도둑은 신겐만이 다룰 수 있다는 말을 타려다 낙마하는 바람에 정체가 탄로나고 만다. 그의 정체가 드러난 순간 도둑을 신겐처럼 따랐던 부하들은 이제 그를 자신들의 공간에서 쫓아낸다. 비내리는 어둑한 배경 속에서 쓸쓸히 대문을 나서야 하는 도둑의 모습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이러니한 것은 도둑은 자신의 임무가 끝났음을 알면서도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 체 신겐의 영지에서 기웃거린다는 점이다. 신겐의 손자가 지나가는 광경을 울타리 너머로 바라보던 도둑이 마치 자신의 손자인 것처럼 그를 애타게 불러보는 모습은 실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둑의 운명처럼 느껴진다.

'란'에서 히데토라의 둘째 아들 역을 맡은 네즈 진파치가 '카게무샤'에서는 신겐의 호위무사로 등장한다. 도둑을 성문 밖으로 내보내는 장면이 '란'과 겹쳐 보인다.


도둑이 신겐의 그림자 무사에서 물러나자 이제 신겐의 자리는 그의 아들인 카츠요리가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신겐의 유지에 따라 산처럼 묵직하게 앉아 가문을 유지할 수 있었던 도둑과 달리 카츠요리는 무리하게 기마병을 투입해 노부나가와 한판 승부를 벌인다고 선언한다. 카츠요리의 공격을 알게 된 노부나가는 드디어 산이 움직인다고 말하며 기뻐한다. 카츠요리의 무리한 야욕의 파멸을 암시하듯 강 너머 보이는 무지개는 그들의 진군을 애타게 막는 것처럼 느껴진다. 결국 신겐의 중신들은 그들의 최후가 다가왔음을 직시하고 각자 마지막 인사를 나눈후 노부나가의 영지를 향해 무리한 돌진을 한다. 기마병을 막기 위해 조총병들을 대기시킨 노부나가 군은 너무나도 쉽게 카츠요리의 군인들을 살육한다. 하나씩 쓰러져가는 말들과 병사들의 비참한 죽음은 전쟁의 비참한 광경을 여실히 드러낸다. 결국 신겐이 그토록 당부하던 가문의 유지는 카츠요리의 무리한 공격으로 뿌리뽑히고 만다. 눈물을 머금으며 전쟁의 비참한 광경을 지켜보는 노부카도의 모습은 쓸쓸하기 그지없다. 카츠요리 군의 시체들만이 가득찬 전쟁터에서 도둑은 마치 자신이 신겐이 된 것처럼 창을 뽑아들고 노부나가 군을 향해 돌진하지만 그는 총을 맞은 뒤 깃발을 향해 손을 뻗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도둑의 죽음 후 물 속에 가라앉은 신겐의 깃발은 비참한 전쟁의 허무함을 극대화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