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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안개] 인간은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전쟁의 안개 The Fog of War>는 2004년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천국의 문>, <씬 블루 라인> 등의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유명한 에롤 모리스가 연출했으며, 현대 음악가 필립 글래스가 선사하는 배경음악은 영화의 묵직함을 더해준다. 영화의 원제는 <전쟁의 안개: 로버트 S. 맥나마라의 삶에서 얻는 열한가지 교훈> 이라는 긴 제목을 달고 있으며, 이 다큐멘터리는 기록 영상들과 이미지 영상들, 그리고 대부분이 로버트 맥나마라의 인터뷰 영상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여분 길이의 이 영화를 지루하지 않게 감상할 수 있는 이유는 로버트 맥나마라의 삶 자체가 20세기 미국 역사상의 중요한 사건들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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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과연 "로버트 맥나마라"는 누구인가. 그는 1916년생으로 버클리, 하버드 등에서 미국의 최상위 엘리트 교육을 받고, 2차 대전 당시에는 르메이 장군과 함께 전략 분석가로 일했고, 포드 가문 출신이 아니면서 최초로 포드 자동차 회사의 사장에 취임한 인물이며, 사장 취임 5주만에 케네디에게 국방부 장관으로 발탁되어, 케네디와 존슨 정부 시절 7년에 걸쳐서 (1961 ~ 1968년)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그후 13년 동안 세계은행 총재를 지낸 인물이다(1968 ~ 1981년). 특히 그가 국방부 장관을 지낸 시기는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 전과 케네디 저격 사건 등과 겹쳐지는 시기이며, 핵 전쟁의 위험과 냉전의 긴장감으로 얼어붙었던 시기를 담고 있기도 하다.

냉전 시대, 특히 쿠바 미사일 위기 사건 같은 경우에 그의 육성으로 듣는 그 당시의 실제 상황은 지금도 섬찟함을 자아낸다.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닥터 스트레인지 러브>에서도 풍자적으로 등장하는 소재이지만, 7,500개의 전략적 핵 탄두가 존재하며, 그 중에서 2,500개는 단 15분만에 단 한 사람의 결정으로 발사될 수 있었던 그런 아찔한 상황, 어쩌면 단 한사람의 판단 실수로 전 세계가 멸망하는 것도 가능했던 그런 상황이 인류 역사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 대사인 토미 톰슨의 침착하고 현명한 대응 덕분에 맥나마라를 포함한 케네디 정부는 올바른 결정을 선택하여 결국 핵 전쟁을 피했다. 이 대목에서 "전쟁에서의 승리란, 전쟁을 피하는 것이 진정한 승리이다."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오류를 저지를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에게 엄청난 권한을 부여하는 핵 폭탄의 존재는 지금까지도 인류를 위협하는 골칫덩어리인 채로 남아 있긴 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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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85세 할아버지라고 하기에는 너무도 또렷한 기억력을 가지고 정확하고 논리정연한 언변을 구사하는 맥나마라의 설명을 따라 흘러간다. 그는 담담하게 과거를 회고하면서 "실수로부터 배워야한다"고 강조하고 "인간 이성의 한계와 오류를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긴 하지만, 맥나마라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많은 인물이다. 2차 대전 당시 그가 담당한 것이 단지 그래프와 통계 자료, 거시적 전략 뿐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는 명백하게 1945년 3월, 단 하룻밤에 10만의 도쿄 시민을 살상하는 일에 가담했던 사람이다. 당시 일본에 대한 일련의 폭격은, 일본의 67개 도시의 인구의 반 이상, 많게는 9할의 인구의 살상을 초래한, 그래서 일본에 대한 두 차례의 핵 폭탄 투하는 사실상 불필요한 일이었다고 종종 말해지기도 하는 잔인한 결정이었다. 그는 살상이라는 목적에 부응하는 전략을 세우는 일을 담당했던 인물이며, "효율적인 폭격"을 위해서 데이터를 분석하고 전략을 개선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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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나마라는 만약에 미국이 패전했다면, 자신이 아마도 전범 재판대에 섰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2차 대전 당시의 전범들과 똑같은 일을 저질렀지만 그가 재판을 받는가의 여부는, 전쟁에서 승리했는가의 여부에 달려있었다. 2차 대전에서의 미국의 승리는 그가 도덕적 잣대에서 비껴서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또한 케네디 정부 시절부터 국방부 장관을 맡았던 그가, 존슨 정부 시절에는 베트남의 미군 병력 축소를 주장하다가 결국 대통령과의 불화로 사임했다고는 하지만, 베트남에 퍼부어진 폭탄의 양은 2차대전 당시 서유럽에 투하된 폭탄의 2~3배라고 한다.

무자비한 공격에 대한 책임을 묻자 맥나마라는 말한다. "전쟁에는 규칙이 없었다"고. 하루에 10만명을 죽이면 안된다는 규칙은 없었기 때문에 도쿄에 폭격을 허용했고, 특정화학물질을 사용하면 안된다는 규칙은 없었기 때문에 베트남에 고엽제 사용을 허용했다고. 그런 것들을 금지하는 규칙들이 있어서 그것이 불법이었다면, 자신은 그런 일을 결정하지 않았을 거라고. 당시는 냉전시대였다고. 논란이 커질 뿐이니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그는 결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도 부인하지도 않는다. 마지막에 "베트남전에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냐"는 질문에 그는 자신있게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국민들이 선출한 대통령의 직무 완수를 도왔을 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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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에 있어서 출중하게 똑똑한 인물들은 사악한 일에 몸담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굳이 국방부에 근무하지 않더라도, 정치 분야든, 경영 분야든, 언론 분야에서 일하든 간에, 분야를 막론하고 어느 정도 사실이 아닌가 싶다. 만약에 순수 과학에 몸담더라도 결국 원자폭탄을 발명하는 사악한 일에 가담하게 되듯이 말이다. 맥나마라는 단지 냉전 체제 안에서,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것일까? 시스템이 사악한 것이고, 시스템 안에서 종속되어 일한 사람은 무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는 영화 <더 리더>에서 제시하는, 홀로코스트의 단순 가담자에 대한 윤리적 질문과도 일맥상통할 것이다.) 조금 더 쉬운 질문으로 바꿔서, "인간의 본성이 원래 사악하고 호전적이서 전쟁을 좋아하는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다음과 같은 대답이 존재한다. "인간을 사악하게 만드는 것은 탐욕이며,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이 품은 탐욕이 그 권력의 확대와 유지를 위해서 전쟁을 도발하는 것이다" 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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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던져진 맥나마라의 말은 영화 내내 머릿속에서 나를 괴롭혔다. "군 사령관이라면 누구나 실수한 적이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누구나 불필요하게 사람들을 죽게 한 적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하면서 그가 내뱉은 "unnecessary killing", 즉 "불필요한 살인(살상)", 이 구절은 나에게 너무도 아이러니하게 다가왔다. 그렇다면 성공적으로 군대를 지휘한 경우에는 "필요한 살인"을 했다는 건가. 이 세상에 과연 "필요한 살인"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인가.

맥나마라가 지휘했던 "효율적인 살상"에서 "효율"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측정되는 것일까? 적의 사상자 수? 아군의 희생자 수? 민간인의 죽음과 병사의 죽음은 똑같이 측정되는 것인가? 전쟁으로 인한 문화 유산의 파괴는 어떻게 측정해야 할까? 도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측정과 계산 과정 속에서 "효율적인 살인"이라는 이 끔찍한 단어는 맥나마라의 업적이 되었고, 그 과정에서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었다고 그는 주장하는 듯 하다. 그는 또한, 그런 맥락에서 "선을 추구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악을 저질러야 할 수도 있다. 다만 그것을 최소화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과연 "선"을 위해서 저지르는 "악"이라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러한 것이 과연 "선"이라고 말해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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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안개>는 작년에 EBS 국제 다큐멘터리 페스티벌인 EIDF 에서 상영한 바 있으며, 국내에 DVD로도 출시되어 있다. 전쟁에 대해서, 인류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또는 미국의 20세기 현대사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필견의 작품이라 하겠다. 맥나마라의 주장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역사에서 우리가 조금이라도 배워나가기 위해서 되새겨 볼 만한 그의 교훈들을 몇 개 적어본다.

- 우리는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되며, 지난 실수들을 통해 배워나가야 한다.

- 이성과 논리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

- 내가 믿는 것과 보는 것이 둘다 틀리는 경우도 많다.

- 나의 결정에 대해서 그 누구도, 심지어 나의 동맹들마저도 설득하지 못한다면,
  내 결정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ps. "전쟁의 안개"라고 번역된 "Fog of War"는 전장에서 군사 작전을 수행할 때 여러가지 불확실한 정보만을 가지고, 적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즉 안개가 낀 것 같은 상황에서 모든 변수를 헤아려서 "옳은" 결정을 내린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이 "Fog of War"는 맥나마라의 잘못된 결정들을 어느 정도 합리화하는 편리한 용어가 되어주기도 한다. 하지만, 전쟁을 "멈추기로 하는" 결정을 제외하고서, 전쟁에서 내리는 그 어떤 결정이 과연 옳은 결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인지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