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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도쿄이야기+걸어도 걸어도] 우리 시대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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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두 배 가까이나 되는, 감독도 벌써 세상을 뜨고 꼬마로 나왔던 배우도 이미 백발성성한 노인이 되었을, 아주 오래되고 또 그만큼 유명한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 <도쿄이야기>를 이제야 보았다. 그리고 늘 그렇듯이 나는 템포가 어긋난 채 문득 작년에 개봉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를 겨우 이해하게 되었다.

 

두 영화는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시선으로 흐르는 세월에 각자 다른 속도로 마모되어가는 부모와 자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마도 그 차이는 두 영화의 간격을 채우고 있을 시대의 변화일 테고, 그렇게 비어 있는 흘러간 시간일 테다.

 

무성영화의 화면을 가로지르던 거대한 증기차처럼 기차가 위협적으로 달려가며, 또 흑백 필름의 다큐멘터리나 뉴스에서처럼 사람들이 총총 걸어가는 모습을 비춰주며 <도쿄이야기>는 시작한다. 그리고 노부부는 과거였다면 한곳에서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을 자식을 먼 곳으로 떼어놓은, 근대화의 의미심장한 상징인 기차를 타고 도쿄로 상경한다. 생판 모르는 아이를 구하겠다고 어이없이 바다에 빠져죽은 장남의 기일을 맞아 장성한 자식들이 제 식구를 데리고 시골의 부모집을 찾아오는 <걸어도 걸어도>와는 반대로.

 

반가움은 잠시, 도쿄의 자식들은 찾아온 늙은 부모가 번거롭기만 하다. 장남은 휴일에 찾아온 환자를 따라가느라 기껏 약속한 시내나들이도 취소한다. 떼를 쓰는 아이들과 다르게 노부부는 이 사태를 순순히 받아들인다. 남편에게 비싼 양과자 대신 센베면 족하다고 잔소리하는 딸의 집에서 노부부는 자식의 집안일을 거든다. 골치 아픈 애물단지가 된 노부부는 아타미 온천으로 쓸쓸하게 밀려나지만, 유흥에 빠진 젊은이들로 소란스러운 여관에서 밤새도록 잠들지 못한다. 그래서 예정보다 일찍 딸네 집으로 돌아왔더니 이번에는 있을 곳이 없다. 이 평범하고 양식화된(아마 이 양식화를 만들어낸 것이 감독 자신이지만) 이야기를 콕콕 가시처럼 가슴에 박히게 하는 것은 배우도, 풍경도, 소품 각각이 아닌 하나의 쇼트를 완벽주의자의 시선으로 찍어내는 오즈 야스지로의 시선이다.


 

그리고 이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같은 섬세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평범한 이야기를 전혀 평범하지 않게 동시대의 가족에 대해 말한다. <도쿄이야기>에서 급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에 번거로운 장례식을 재빨리 끝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제몫을 챙기고 떠나가는 오빠, 언니가 무정하다며 우는 소리를 하는 막내딸에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쓸쓸하게 조언하던 며느리의 말처럼. 모두가 저마다의 생활에 치여 서로를 부둥켜안지 못한 채 아니, 그러려고 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고레에다 영화에서 가족은 의무감으로 혹은 욕심으로 친가에 돌아온다. 어머니는 부지런히 음식을 장만하고 비싼 스시를 주문하고, 또 저녁으로 비싼 장어덮밥을 주문해 먹으며 식구가 줄었다며 다행으로 여긴다. 어린 시절 먹었던 옥수수튀김 앞에서 오랜만에 모인 가족들은 잠시 옛일을 떠올려 화기애애하지만 그 추억조차 통일되지 못한 채 각자의 기억으로 엇갈린다.


<도쿄이야기>에서 정작 노부부에게 도쿄 관광을 시켜주고 진심으로 마음을 다하는 이는 전쟁 때 잃어버린 자식의 아내,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고단하고 쓸쓸하게 살아가는 전후 세대 미망인인 며느리다. <걸어도 걸어도>에서는 그 다정한 며느리의 자리가 비어 있다. 대신 거기에 어머니가 가족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차남과 재혼한 여인과 양아들이 들어서 불편하고 서운한 마음으로 잠시 머문다. 일 때문에 가족을 내팽겨뒀던 고집불통 아버지는 병원을 이을 자식도 없이 늙어 지금은 이웃이 죽어가는 모습을 무력하게 바라봐야 한다. 아버지가 미웠던 자식은 그 모습을 보고도 모른 척할 뿐이다. 그러나 그 남인 아이가 맺힌 게 많은 아들의 바람과는 다르게 부모의 소원을 이뤄줄지도 모른다.


 

시대는 변했으나 죽어도 살아도 자식은 섭섭한 존재라는 <도쿄이야기>의 아버지의 한탄은 여전히 유효하다. <걸어도 걸어도>에서 죽은 장남은 어머니의 가슴을 무정하게 할퀴어 놓았다. 아들의 목숨값에 티끌도 되지 못할 생활을 영위해가는 그 아이를 매년 괴롭히는 것으로 그녀는 상처를, 그 빈 시간을 견딘다. 다음날 차남은 다음 설에 오지 않아도 되겠다고 말하며 떠나지만 부모는 다음 설에나 자식을 보게 될 것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렇게 높은 언덕 위의 무덤가를  걷지 않고 차를 타고 편하게 가고 싶다는 어머니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영화는 아들의 씁쓸함 후회만을 남겨둔 채 끝을 맺는다.

 

한평생을 같이 살아온 부인이 세상을 떠난 새벽 일출이 몹시도 아름다웠다고 무심하게 말하는 <도쿄이야기> 아버지의 딴소리처럼, 장남의 혼이 나비로 변해 돌아왔다는 어머니의 망령스러운 중얼거림을 이번에는 아들이 전승되는 설화처럼 제 자식에게 들려주게 된다.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는 아마도 무상하게 흘러가는 세월을 바라보는 부모 세대의 시선일 것이다. 이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처럼 결코 살아줄 수 없는 자식의 시선으로 덧없는 삶을 이야기한다. 모던과 근대사를 통해 막 엇갈리기 시작한 시대로부터 우리는 훨씬 더 멀리까지 흘러왔다. 그러나 고속철도로 더욱 더 빠르게 세계를 달려갈 수 있는 이 시대에도 우리는 여전히 단절된 세대 간의 간극을 메우는 요령을 모른 채, 모든 것을 풍화시키며 지나가는 시간에 대응하는 법을 모른 채 모나고 부서진 서로의 몸을 부대끼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갈 곳을 모른 채, 사실 우리가 이를 곳은 단 한군데이지만, 풍파에 시달리는 작은 배처럼 걷고 또 걷는 법밖에는 알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인간이 결코 역사를 체험할 수는 없듯이,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한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또 살아가야 하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