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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더 로드]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더 슬픈 이야기

 


존 힐코트의 <더 로드>
에는 멸망한 세계가 등장한다. 하루 아침에 재앙으로 뒤덮이게 된 이 세계는 잿가루가 휘날리는 폐허가 된 도시들로 가득차있다. 나무들은 계속해서 쓰러져내리고 동식물의 흔적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도시들에 존재하는 것들이라고는 '잿가루'와 '적막감'과 '공허함'뿐인데 그 거리를 소년과 남자는 카트를 끌면서 걸어간다. 부자 관계인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신발과 몇 안되는 식량 뿐이다. 흑백의 세계속에서 생존한 사람들은 두 분류로 나뉘었다. 부족한 음식 때문에 사람들을 잡아먹기로 결심한 인간들과 그들을 피해서 살아가는 피난민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을 규정하는 것은 바로 '인간성의 유무'다. 인간성을 잃어버린 이들은 식인을 하고, 그들이 지나간 곳은 발자국과 핏자국이 난무한다. 반대로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최소한의 양심'을 따른다. 아무리 세계가 이전과 많이 달라졌을지라도 이전의 세계에서 따르던 양심과 인간성을 중요시하고 그를 쫓는 것이다. 이들은 식인하는 인간그룹들을 피해서 살아남아야 하고, 그것이 바로 이들의 인생이다. 사실 이 두 분류의 인간들 모두 목적은 동일하다. 이들 모두의 목적은 바로 '폐허로 뒤덮인 세계에서 생존하는 것'이고 각기 자신의 철칙대로 행동했을 뿐이다. 다만 그 과정이 몹시 다르고 그 과정에서 선택한 부분이 반대인 것이다. 식인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방법은 바로 '다름사람들을 죽이고 먹음으로써 무질서의 우위에 서는것'이고 이들은 이를 행동으로 옮긴다. 하지만 반대편에 서있는 인간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이 세상에서 생존하는 방법은 '눈에 띄지 않으면서 살아 나가는 것'이다. 결국 이 두 부류의 인간들을 구분하는 것은 '양심의 잔재'다. 영화의 주인공인 남자와 아들은 당연히 후자에 속한 인물들이고, 남자는 아들에게 자신들은 '굿 가이'고 우리들은 '나쁜 사람들'로부터 살아남아야 한다고 외친다.

이들이 이 세상을 생존하면서 남자와 아들 사이의 관점 차이가 드러나기도 한다. 아들은 멸망 이후에 태어나고 자랐다. 아이의 탄생에 있어서도 남자와 아내 사이의 논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아내는 이 세계에서 아이가 태어나는 것은 절망뿐이라 생각했고, 남자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했다. 결국 이 둘은 아이가 성장하는 동안에도 생존에 대한 의견 또한 서로 반대였고 결국 아내는 그들의 곁을 떠나서 바깥으로 걸어나간다. 바깥은 어둠, 즉 죽음을 의미했다. 그녀에겐 생존이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었고 이 세계를 살아나갈 의지 또한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삶이 또 다른 족쇄였던 것이다. 하지만 남자는 달랐다. 그는 아이를 위해 생존을 주장하면서 험한 세상을 받아들인다. 즉, 그에게 아이는 그가 인간성을 유지시켜줄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이자 삶의 이유였던 셈이다. 하지만 아이는 남자만큼 세상에 대해서 잘 알고 있지 않았다. 아이는 정이 많은 인물로 그려지는데, 그러한 순수함을 가지고 있던 이유 또한 바로 아이가 세상에 대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들의 음식을 다른 이와 나누면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멸망 이후에 태어난 아이가 본 것이라고는 폐허가 된 세계지만, 가치관과 성품 만큼은 이전의 '여러 색상이 존재하던 폐허 이전의 세계'에 가까운 셈이다. 아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온화함을 베풀 줄 알고, 이는 이 세상 속에서도 잔재하고 있는 인간성을 의미하기도 하다. 결국 흑백의 세계와 아이는 완벽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는 결국 이 영화의 마지막과도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아이에게 세상이란 여전히 너무나도 무서운 곳이라 아이는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남자가 영원히 아이를 보살필 수는 없는 법이다. 결국 아이는 남자의 곁을 떠나야 하고, 생각보다그 시기는 빨리 찾아온다. 하지만 아이에게 또 다른 가족이 찾아와서 동행을 하자고 제안을 한다.그 새로운 가족은 아이를 보살펴줄 새로운 존재임에 동시에이 세상에 남아있는 인간성을 의미하기도 하다. 그들은 아이가 주장했던 '착한 사람'이었던 것이고 아이의 믿음이 보상받은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그 어떤 재난 영화보다도 절망적이면서 희망적이기도 하다.

 아이는 그들에게 불꽃을 가지고 있냐고 묻는다. 남자가 아이에게 강조하던 불꽃은 이 세계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라는 것을 의미했다. 사실 폐허로 변해버린 이 세계에서 희망을 이야기한다는 건 힘든 이야기다. 오히려 어리석은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들이 살아가야만 하는 세상은 고요하면서도 죽음에 밀접해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속에서 주인공들은 수많은 죽음을 본다. 이 세상을 견디고 살아나갈 자신감이 없어서 스스로 택한 죽음부터 , 식인을 하는 무리에게 잡혀서 맞이하는 죽음까지. 사실 죽음은 이들 곁에 항상 존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죽을 수 있다는 것'조차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실제로 이들에게 죽음이란 축복도, 저주도 아니다. 그저 이들이 삶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 그들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죽음과 삶'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뚝심있게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가는 것 또한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지만, 무엇보다도 이 영화 속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바로 영화의 배경인 멸망한 세계 그 자체다. 사실 맥카시의 소설을 영화화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궁금하면서도 우려가 들었던 부분이 바로 '황폐한 세계의 재현' 부분이었다. 하지만 우려와 달리 영화는 그 점에 있어서는 무척이나 훌륭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에 있어서 최대의 단점을 꼽으라면 그것은 바로 '원작의 존재'일 것이다. 앞서 썼듯이 이 소설의 원작은 꽤나 유명하며 많은 이들에게 극찬을 받았었다. 그래서인지 영화는 소설의 줄거리를 압축해 놓은 것인 것 마냥, 철저하게 원작에만 충실한 모습을 보인다. 영화로는 잘 옮겼되, 그보다는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원작에 대한 존경'이 이 영화의 최대 단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무척이나 사실적으로 세계를 그려냈다는 점이다. 만약에 우리가 이들처럼 갑자기 지구 멸망을 맞이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초반부에는 우리도 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며 용기를 갖고 살아가겠지만,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리면 우리의 마음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누군가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가 있는 부모라면 영화 속의 아버지처럼 아이를 위해서 생존을 하려고 노력을 할 지도 모른다. 부모에게 자식이란 그 자신보다 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 속 내용들은 사실적이라, 더 슬픈 이야기로 변해버리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