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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셔터 아일랜드] 죄의식이 빚어낸 처참한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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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터 아일랜드 (Shutter Island)

마틴 스콜세지 감독, 2009년

정교한 스토리와 이미지로 재현한 심리 스릴러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비바람이 몰아칠 것 같은 잿빛 하늘 아래, 한 척의 배가 불길한 기운을 가득 안은 채 유유히 바다 위를 항해하고 있다. 배가 향하고 있는 곳은 정신질환을 지닌 극악한 범죄자들을 격리시켜놓은 오래된 정신병원이 있는 외딴 섬 ‘셔터아일랜드’. 연방보안관 테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동료 척(마크 러팔로)과 함께 이곳에서 일어난 의문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셔터아일랜드로 가는 중이다. 이들의 여정은 시작부터 만만치 않다. 지금까지의 삶이 수월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듯 얼굴 한 편에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드리운 테디는 뱃멀미 때문에 고생이다. 화장실에서 또 다시 찬물로 세수를 하고는 거울을 바라보며 되뇐다. “정신 차려야 해, 테디.”


무심코 지나칠 사소한 대사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을 여는 테디의 이 첫 대사만큼 <셔터 아일랜드>를 가장 잘 요약해놓은 한 마디도 없다. 이 장면은 그저 뱃멀미에 약한 테디를 보여주기 위한 것일까. 그럼에도 굳이 이 장면으로 테디의 첫 등장을 처리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 보인다. 테디가 단순히 뱃멀미 때문에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 정신을 차리자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 곧 테디에게는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스스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비밀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점. 영화는 이 한 마디의 대사를 통해 테디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넌지시 드러내 보인다. 물론, 영화는 마치 거짓말을 하다 들킨 아이가 얼버무리는 것처럼 관심을 이내 스토리의 중심에 놓인 (듯 보이는) 의문의 실종 사건으로 돌린다. 하지만 끝내 진실을 인정하고 말 것이다. <셔터 아일랜드>는 실종 사건에 대한 영화가 아닌, 테디라는 인물의 무의식을 파고드는 영화라는 사실을 말이다.

스릴러에서 중요한 것은 긴장과 서스펜스를 극대화하여 관객을 영화에 몰입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를 위한 미스터리한 사건과 의외의 반전은 스릴러의 단골손님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당연히 <셔터 아일랜드>도 스릴러의 공식을 따라 예상외의 스토리 전개와 반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그 쾌감은 생각만큼 강하지 않다.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한 의문투성이의 실종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지만, 정작 영화의 관심은 이 사건보다는 사건을 수사해나가는 테디라는 인물의 심리에 놓여 있음을 영화가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알아챌 수 있기 때문이다. 테디의 첫 대사부터 정신병원에 도착한 뒤 테디를 괴롭히는 악몽의 이미지들, 그리고 테디와 척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들까지 <셔터 아일랜드>는 실종 사건의 정체를 밝혀내기보다는 테디라는 인물이 지닌 비밀을 파헤치는데 열을 올린다. 그런데 이 흐름이 어색하지 않다. 소설가 데니스 루헤인의 탄탄한 이야기는 정교하게 계산된 카메라 워킹으로 담아낸 화면, 놀랍도록 아름다운 미장센, 그리고 매끄러운 편집까지 장인다운 면모를 선보이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연출로 완벽하게 스크린 위에 되살아나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토록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다짐했던 테디. 하지만 결국 테디는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 실종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데도 실패한다. 대신, 테디는 자신이 그토록 외면하고 싶었던 진실을 셔터아일랜드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이 모든 것들이 자신의 무의식 속 깊숙한 곳에 감춰둔, 도저히 인정할 수 없었던 죄의식이 낳은 끔찍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마주하고야 만다. 감춰진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의 충격보다도 더 깊은 잔상을 남기는 것은, 그 순간 처참한 표정과 함께 끝도 없이 무너져 내리는 테디의 나약한 내면, 그 속에서 느껴지는 한 인간의 짙은 슬픔이다. 더욱 슬픈 사실은 이 모든 죄의식이 테디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생겨난 것이라는 점이다. 전쟁이 한 인간에게 새겨놓은 무언의 상처는 그렇게 끔찍한 결말로 이어지고야 만다. 무의식에 깊이 박힌 트라우마는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무의식 속 상처 앞에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해질 수 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셔터 아일랜드>다. 오직 관객의 허를 찌르기 위해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반전에 집착하는 스릴러가 아닌, 인간의 무의식적인 심리와 그 속의 죄의식을 정교하게 짜인 스토리와 이미지로 재현해내는 심리 스릴러라는 사실, 그것이 바로 <셔터 아일랜드>가 매혹적인 이유다.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