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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붉은 수염 (赤ひげ, 1965)

'붉은 수염'은 막부 시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로, 한 청년이 진정한 스승을 만나 성숙한 인간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잔잔히 묘사한 작품이다. 영화는 요양소의 대문을 향해 들어가는 한 청년의 뒷 모습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나가사키에서 네덜란드 의학을 공부한 야쓰모토는 아버지의 소개로 요양소에서 경험을 쌓고자 하나 요양소의 환경이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열악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야쓰모토가 그의 전임자 소개로 요양소의 내부 공간을 둘러보는 과정을 통해 '붉은 수염'이란 의원의 정체에 대한 호기심을 준다.
 
불그스름한 수염을 지녀 '붉은 수염'으로 불리는 니이데 쿄조는 무뚝뚝한 말투로 야스모토에게 오늘부터 이 곳에 남아 활동할 것을 반강제로 요청한다. 애초에 이 곳에 남고 싶지 않았던 야쓰모토는 자신의 짐을 미리 이 곳에 놓게 하고 자신의 필기본을 제출할 것을 요구한 니이데의 행동에 분노한다. 그리고 자신을 요양소에 파견한 것이 막부의 권력과 연줄이 있는 아버지 친구의 계략이라고 생각한 야쓰모토는 일종의 태업을 벌인다. 요양소 의복도 입지 않고 밥도 먹지 않으며 심지어 술을 사 먹는 안하무인한 행동을 벌임으로써 그 곳에서 강제로 쫓겨나길 바란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방탕한 행동은 커다란 위험으로 다가온다. 어느 날 격리수용된 여성 환자가 야쓰모토의 방을 찾아오자 그는 술에 취해 그녀의 묘한 행동에 홀리고 만다. 영화는 많은 장면들을 내부의 공간 속에서 촬영하고 있는데, 촛불을 밝힌 공간 안에서 그림자를 돋보이게 하는 효과를 통해 인물의 또 다른 내면을 느끼게 하는 효과를 준다. 환자가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으면서 점점 야쓰모토에게 다가가는 장면이 바로 이런 효과가 두드러지는 장면인데, 점점 다가오는 여인과 그녀를 바라보는 야쓰모토의 넋나간 모습을 점점 클로즈업으로 다가가는 효과를 주어 긴장감을 준다. 여인의 계략에 빠져 죽음의 위기에 빠진 야쓰모토는 니이데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음을 알게 된다. 야쓰모토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슬며시 종이를 내미는 니이데의 행동을 통해 영화는 그가 무뚝뚝하고 괴팍한 겉모습과 달리 다정다감하고 인품있는 의사임을 드러낸다.

자신의 방탕함으로 곤혹을 겪었던 야쓰모토는 마음을 열고 요양소의 일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이 서양 의술을 배워 누구보다 우월한 의사라고 믿었지만 요양소에서 생과 사를 넘나드는 환자들의 모습과 그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붉은 수염의 모습을 보면서 충격과 두려움을 느낀다. 결국 자신은 이론만 아는게 많았던 햇병아리였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또한 야쓰모토는 니이데를 통해 병의 발생과 치료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듣게 된다. 만병의 근원은 빈곤과 무지로 인해 발생하며, 병 속에는 인간의 불행이 담겨 있으므로 의사는 환자의 마음 속 심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야쓰모토는 붉은 수염의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두 환자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체험하게 된다. 요양원에 들어온 뒤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지 않던 류노스케라는 노인의 죽음 후 찾아온 그의 딸을 통해 류노스케가 가족의 사랑을 누구보다 원하던 쓸쓸한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며, 일중독자 사하치의 기이한 행동이 자신의 기구한 인연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영화는 환자들의 사연을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풀어내기도 하고 사하치의 사연의 경우 플래쉬백의 형식으로 사연을 드러냄으로써 기구한 사연을 설득력있게 전달한다. 특히 사하치의 사연의 경우, 지진으로 인해 행방불명되었던 아내와 재회하는 장면을 통해 빛과 어둠을 효과적으로 연출하고 있다.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하치의 얼굴에 어두운 빛을 투영하고 반대편 아내의 경우 밝은 색 계열의 의상을 입고 밝은 빛을 비춤으로써 상대적인 심리를 시각적으로 잘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