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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유, 더 리빙 (Du Levande,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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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편의 2008년 씨네휴 프로그램 상영작 가운데 두번째로1) 감상한 작품입니다. 스웨덴 영화인데요, 로이 안데르손 감독은 2000년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Sånger Från Andra Våningen)로 깐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했던 이력이 있더군요. 친구나 동료 등 아마추어 연기자들로 출연진을 구성하고 대본이나 촬영 스케줄도 없이 무턱대고 영화를 찍는 괴짜 감독이라고 합니다. 6년만에 내놓은 <유, 더 리빙> 역시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인 듯 합니다. 그러나 <유, 더 리빙>의 중요한 특징은 출연한 배우들의 연기 경험 유무가 아니라 작품 전체를 일관하는 내러티브가 없다는 점입니다. 필름으로 찍은 연작 시(詩)와 같은 영화라고 할까요. 수많은 등장 인물들이 각자의 단편을 연기하면 카메라는 미동도 하지 않고 단 한 컷의 롱 테이크로 각 장면들을 담아내는 식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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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은 모두가 북구의 쌀쌀한 날씨 만큼이나 창백한 표정을 한 채 별다른 이유 없이 굉장히 우울해하고 외로워하며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어처구니 없이 죽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모여서 이루고 있는 풍경은 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도시가 아니라 이승과 저승의 중간 지대 어디 쯤인가로 보이기까지 합니다. 때마침 아침 안내 속에 도착한 열차는 괴테의 시에 나오는 그 강, "레테"행 열차더군요. 괴테의 싯구는 영화 오프닝에서부터 등장합니다. "살아 있는 자여, 기뻐하라 / 네 아늑하고 따뜻한 침대 위에서 / 레테의 차디 찬 파도가 네 발걸음을 잡아채기 전에." 그러나 영화 속 인물들은 하나 같이 자신의 살아있음을 기뻐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죠. 어떤 인물들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관객들에게 직접 대사를 전달하기도 합니다. 거의 걸어다니는 시체 수준의 정신과 노의사는 이제껏 보여진 인물들에 대한 감독의 입장을 직접적으로 대변합니다. "이런 이기적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하니 아주 죽을 맛이랍니다." 감독은 각 장면은 코믹한 톤으로 다루고 있지만 결국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이유는 비판하고 훈계하기 위함입니다.

이승과 저승의 중간계처럼 보인다고 해서 괴기스럽게 보이는 건 아닙니다. 시각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동화책의 섬세한 일러스트를 보는 듯 너무나 아름다운 미장셴을 선보입니다. 그러나 생기가 없는 창백한 아름다움일 뿐입니다. 파스텔톤의 아름다운 화면 속에서 사람들의 모습은 그저 이승을 떠도는 유령처럼 보일 뿐입니다. 대부분의 등장 인물들이 중년이거나 노년의 나이인 가운데 이제 막 성년의 나이가 된 듯한 소녀(제시카 룬드베르그)가 하나 등장합니다. '블랙 데블'이라는 밴드의 보컬 겸 기타리스트 미케(에릭 베크만)를 좋아한댑니다. 그녀는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미케와 결혼하는 꿈입니다. 이 장면이 완전 명장면입니다. 막 결혼식을 마친 두 사람의 신혼집은 사실은 열차입니다. 창 밖으로 풍경이 지나가고 결국 기차역에 도착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결혼과 미래를 축복합니다. 미케의 기타 연주와 음악도 참 근사합니다.2) 그러나 <유, 더 리빙>에서 이것은 소녀의 꿈일 뿐입니다. 카페에 앉아 있던 노인도 자신의 꿈 이야기를 합니다. 자신이 죽어서 하늘을 날아 올랐는데 아버지, 어머지를 만났다며 너무 근사했더랍니다. 그러나 그것 역시 꿈입니다. 오직 꿈 속에서만 행복한 삶과 죽음이 가능한 우화라니, 뭐 이런 안타까운 경우가 다 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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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카페 장면은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그 때마다 카페 주인은 종을 울립니다. "마지막 주문을 받습니다. 지금 주문하지 않으면 내일입니다." 소녀의 꿈 이야기를 함께 들었기 때문일까요? 다른 때와 달리 손님들의 움직임이 조금 빨라진 것 같기도 합니다. 일관된 내러티브가 없는 영화라고 해서 플롯마저 없는 작품은 아닙니다. 오히려 <유, 더 리빙>이 던지는 메시지는 아주 명확합니다. 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삶의 문제란 <천국의 가장자리>(2007)에 겨우 매달려서 간당간당하게 살고 있는 터키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겐 아직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지상낙원이라 불리우는 스웨덴과 같은 복지국가에서는 굉장히 절실한 문제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면 <유, 더 리빙>의 사람들은 생의 기쁨을 누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삶의 고통이라 할만한 것도 별로 없어 보이더군요. 고통이 없이는 기쁨도 없다는 것이야 말로 인생 최대의 아이러니 아니겠습니까. 더이상 꿈만 꾸지 말고 모니터 앞과 영화관을 벗어나 자신의 삶 속으로 뛰어들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You, The Living (Du Levande, 2006) trailer



1) 사실 <천국의 가장자리>(2007) 다음으로 오스트리아 영화 <수입/수출>(Import/Export, 2007)을 더 보고 싶었으나 10 여 분을 잘라낸 채 15세 관람가로 상영한다고 해서 망설이는 중입니다. 18세 이상 무삭제로 관람할 수 있으면 가장 좋을텐데 그게 언제 가능하게 될런지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난감하네요. 영화는 궁금하지만 편집된 버전을 보느니 차리리 안보고 말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2) <숏버스>(2006) 의 마지막 장면에서 저스틴 본드가 In The End를 부르는 장면 만큼이나 가슴 뭉클한 대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숏버스>에서의 축제 퍼포먼스가 그대로 영화의 결말로 사용된 만큼 좀 더 의지적이고 낙관적인 느낌을 남겨주는 반면 <유, 더 리빙>에서의 꿈 속 결혼과 기타 연주 장면은 현실과의 대비를 위해 사용되면서 더욱 안타까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편입니다. <숏버스>가 위로를 남겨준다면 <유, 더 리빙>은 각성을 주는 영화입니다.


ps1. 앞으로는 핀란드에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있다면 스웨덴에는 로이 안데르손이 있다고 해야겠습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 영화 속 이미지가 실제 핀란드의 모습과 다르듯이 로이 안데르손의 <유, 더 리빙>의 모습이 실제 스웨덴의 모습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속 모습들은 감독들이 바라본 일종의 '심상의 시각화'일테죠. 그럼에도 두 감독에 보여주는 핀란드와 스웨덴의 모습은 실제 두 나라 만큼이나 서로 닮았으면서도 또 다른 색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ps2. 배우들이 직접 노래하거나 연주하는 음악들이 참 괜찮은 편인데요 아바의 멤버였던 베니 안데르손이 오리지널 스코어로 참여했습니다. 아마 다른 수록곡들도 베니 안데르손이 선곡은 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전체 수록곡이 많지 않아 <유, 더 리빙> 공식 OST 앨범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