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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나는, 인어공주 (Русалка,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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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시사회로 영화 한 편 봤습니다. 관객 모니터링 시사회라서 영화 끝나고 설문지도 작성하고 그랬습니다. 5월 중에 개관 예정인 씨네큐브 이화(이대)의 개관 기념 개봉작이라더군요. 극장 관객이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작은영화 전용관으로 가장 성공적인 입지를 다져온 씨네큐브의 상영관 확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에는 국내 첫 일본영화 전용관을 표방했던 CQN명동이 폐관하기도 했었잖아요. 이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씨네큐브는 자기 관객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찾아나서고 있는 셈인데요, 하이퍼텍 나다, 스폰지하우스 등과 더불어 우리나라 관객들이 좀 더 다양한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해주는 작은영화 전용관의 대표 주자로서 앞으로도 굳건히 자리를 잡아가시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국내에서 작은영화 전용관을 하려면 막연히 유동 인구가 많은 곳 보다는 대학가 근처가 낫지 않은가 생각해왔는데 씨네큐브 이화가 그와 같은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서울 시내 대학 근처에 자리잡은 작은영화 전용관으로는 홍대 앞의 시네마상상마당도 있지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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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영화인데 선댄스와 베를린 영화제에서 호평을 받았다는 것, 그리고 제목과 같은 안데르센의 동화에서 모티브를 빌려온 영화라는 정도만 알고 봤습니다. 안데르센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들로는 먼저 1989년에 만들어진 디즈니의 애니메이션과 흥겨운 주제곡 "Under the sea"가 생각나고, 톰 행크스, 대릴 한나 주연의 <스플래쉬>(1984)도 있지요. 최근에는 박흥식 감독, 전도연 주연의 한국 영화 <인어공주>(2004)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두 사람으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면서 끝나는 신데렐라나 백설공주와 달리 인어공주의 이야기는 사실 비극적인 결말을 갖고 있는 작품이죠. 어디에서 봤는지도 모르겠고 중간의 경위가 어떻게 되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존재 자체가 물거품이 되어 사라져버리는 인어공주의 마지막 모습만은 생생합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의 설정은 많이 다르지만 원작의 모티브를 가장 잘 살리고 있는 작품이 2007년 러시아 영화 <인어공주>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국내 영화정보 사이트에는 등록조차 안되어 있는 작품인지라 IMDb에서 찾아보고서야 안나 멜리키안(Anna Melikyan)이라는 여성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로모 카메라로 찍은 2시간짜리 활동 사진'이라는 표현이 떠오를 정도로 무척 인상적인 화면1)과 적절한 배경 음악의 사용이 좋았을 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채기가 힘들었는데, 여성 감독의 작품이라는 단서 하나가 많은 것을 설명해주더군요. <인어 공주>는 여왕이 아닌 공주, 어린 소녀의 순진한 사랑에 관한 현대적인 우화입니다. 타이틀롤의 짧은 애니메이션에서 큰 물고기들 틈에서 누군가를 찾고 있는 듯한 작은 물고기 한마리의 모습이 보여지는데요 이 작은 물고기 한 마리는 나중에 어른들의 사랑에 잠시 끼어든 주인공 알리사(마리야 샬라예바)의 존재을 상징하게 됩니다. 해변가의 고향을 떠나 '갈 곳 없는 자들이 모이는 도시' 모스크바에서 알리사는 마침내 그 누군가를 얻게 되는 듯 하지만 그 사랑은 결국 알리사, 순진한 소녀의 몫은 아니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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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신비로우면서도 상당히 낙천적인 편입니다. 마치 케빈 스미스의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 캐릭터 제이(제이슨 뮤즈)를 연상케 하는 알리사의 외모만 봐도 이 영화가 기존의 공주님 영화들과는 그 궤도를 달리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물고기의 유전자를 가진 인어는 아니지만 자기 나름대로 신화적인 탄생 배경을 갖고 있는 알리사는 7살 때부터 '간절히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지는' 초능력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게 되죠. 그러나 그 초능력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을 때에는 다른 누군가의 희생이 수반된다는 원칙 또한 차츰 배우게 됩니다.2) 해변가의 마을을 떠나 모스크바로 이사를 하게 되는 과정에서는 알리사의 초능력이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러나 <인어공주>는 여주인공의 수퍼파워에 관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원하는 그 사랑은 결국 얻지 못하고 만다는 결말 때문에 원작의 씁쓸한 뒷맛을 되살려주는 장치 정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리 이쁘장한 얼굴도 아니지만 나름대로 독특한 자기 세계를 가진 주인공이고 종종 웃음을 자아내는 순간들도 많기 때문에 관객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주인공 남녀가 잘 되기를 바라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인어공주>의 결말은 영화 전반의 분위기와 달리 너무 급작스럽다는 느낌을 주는 편입니다. 하지만 알리사가 현실 속의 인물이 아니라 무언가를 상징하는 의인화된 존재라고 생각하면 비교적 수월하게 풀리는 작품이란 생각이 듭니다. 알리사의 순진한 사랑이란 결국 섹스 이전의 사랑일텐데요, 이는 알리사가 어머니의 섹스나 샤샤(예프게니 치가노프)와 성숙한 여인(베로니카 스쿠지나)의 섹스를 목격했을 때의 격한 반응이 그렇습니다. 어린 시절에서 막 성년이 된 나이게 이르기까지 누군가에게 간직되어 왔던 자아의 한 단면이 알리사이고 <인어공주>는 그에 관한 작가의 기억을 담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모든 이들이 공감하지는 않겠지만 누군가는 완전한 자신의 이야기처럼 받아들일 수도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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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장면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장면에서는 정말 로모 카메라로 찍은 듯이 '화면 바깥 쪽이 검게 그을리는' 효과를 보여줍니다. 어린 시절의 장면들에서는 장 삐에르 주네 감독의 초기작들이 생각나기도 하는데,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같은 러시아 영화인 <리턴>(2003)의 화면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로 회화 작품을 완성하는' 빛나는 전통 덕분인지 이따금 보게 되는 러시아 현대 영화들은 다른 나라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아주 섬세한 색감의 화면으로 관객들의 마음을 일단 사로잡아 버린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2) 이런 원칙은 일본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2006)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던 것이죠. <인어공주>에서 알리사의 초능력이 정말 실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본인의 과대망상인지는 분명치가 않습니다. 알리사의 초능력이 실재라면 대학 입학을 위해 초능력을 사용했다가 합격자 한 사람을 죽게 만든 사건 이후 샤샤(예프게니 치가노프)의 마음을 얻기 위해 비행기 하나를 떨어뜨렸다는 얘기가 되는 건 혹시 아닌가요? 그리고 가장 행복한 순간에, 그 순간이 영원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바람에 그런 결말을 맞게 된 것은 아닌가요? 영화의 내러티브에서 알리사의 초능력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과 맞물린 풀리지 않는 매듭이 몇 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