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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라이프 (三峽好人, 2006) & 동 (東,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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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국내 개봉했던 지아 장커 감독의 <스틸 라이프>를 DVD로 감상했습니다. 정성일씨의 음성 해설과 함께 70분 분량의 다큐멘터리 <동>이 함께 수록되어 있더군요. <스틸 라이프>를 다 보고 나서 다른 볼 만한 것이 없나 둘러보다가 무심결에 음성 해설 메뉴를 눌렀는데 정성일씨가 "두 작품 가운데 무엇을 먼저 봐야 하느냐는 질문을 지아 장커에게 했더니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동>이라고 대답했다"면서 "여러분, 꼭 <동>을 먼저 보십시오" 하더군요. 나 이거야 원. <스틸 라이프>를 먼저 봐버린 날 더러 어쩌란 말이냐. 저는 <스틸 라이프>를 먼저 보고 다음 날 <동>을 봤습니다.

정성일씨는 약간 흥분된 그 어조부터 참 여전하시더군요. 예전에 <키노> 잡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이유는 영화를 보는 특정한 관점을 너무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기억해둘 만한 내용들도 있었지만 개별 작품에 대한 감상과 해석은 어디까지나 감상자인 내 자신의 몫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 다 같이 뜻을 모아야 하는 일이라면 좀 더 효율적이기 위한 한 가지 방식을 정해두는 것이 낫겠지만 영화를 놓고 그럴 필요야 없지 않습니까. 그림을 보면서 내 앞의 그림과 현재의 나 자신의 대화를 즐기고 그 대화를 간직하려는 과정에 다른 사람의 견해나 원칙이 끼어들 필요가 없듯이 영화도 마찬가지라 생각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정성일씨의 해설이(다 듣지는 않았지만) 부담스러운 수준을 넘어 그 꼰대질에 심한 거부감이 느껴졌을텐데 이제는 그렇지가 않더군요. 그게 다 열의와 성의가 넘쳐서 그런 것이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결코 나쁜 의도인 것은 아니라는 거죠. 그럼에도 듣는 이가 듣기 싫다면 안들으면 그만인 것입니다. 누군가의 명성이나 직함에 주눅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영화에 관해서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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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아 장커의 이름만 간간히 들어보다가 재작년 필름포럼에서 <세계>(2004) 를 봤더랬습니다. 굉장히 심오한 영화를 하는 줄로만 알았는데 중간에 애니메이션도 들어가는 등 형식적으로는 상당히 발랄한 편이더군요. 세계적으로 유명한 중국 감독들이 많지만 제가 이제껏 본 가운데 '현재의 중국에 대해 가장 진솔하게 이야기'하는 감독이란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로 하여금 지아 장커라는 이름을 추종하게 만들 정도의 큰 매력은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작년 <스틸 라이프>의 개봉을 그냥 지나치고 말았던 거죠. 다시 한번 중국의 오늘, 그런 이야기겠거니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지난 연말에 많은 분들이 2007년 베스트로 <스틸 라이프>를 꼽는 모습을 보고 영화 안본 걸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5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무용>을 봤죠. 그 흔한 나레이션 한번 쓰지 않으면서 자기 할 말을 다하고 있더군요. 마이클 무어와 비교하면서 다큐멘터리의 형식 규범을 지키지 않았다는 요지의 비판도 접했습니다만 저야 뭐 그런 걸 신경쓰는 편은 아니니까 별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규범 보다 중요한 건 내가 그것을 보고 어떻게 느꼈느냐는 것이니까요.

<스틸 라이프>는 <세계>와 같은 극영화이면서 좀 더 진중한 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더군요. 지아 장커의 작품들이 한 때 중국 내에서 상영금지 조치를 당했었다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전세계로 전송되는 미래지향적인 중국의 이미지와 달리 지아 장커의 영화는 그 그늘 밑을 응시하고 있으니까요. 드러내놓고 정부 정책을 비판하지는 않습니다만 마오쩌둥 시절부터 중국 지도부의 오랜 염원이었다고 소개되는 산샤댐 공사와 그로 인해 조금씩 수몰되어 가고 있는 쓰촨성을 작품의 배경으로 선택한 것만 해도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그리 마음 편할 리가 없을 겁니다. 영화 중간에 얼마 전 대지진으로 무너져내린 쓰촨성의 시가지가 나오는데 '이거 혹시 귀신 들린 영화는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튼 <스틸 라이프>는 개방 이후 마치 돌격대처럼 약진하고 있는 중국의 겉모습이 아닌, 그로부터 철저히 소외되어 있는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중국 지식인의 입장에서 밀착해서 취재하고 있는 영화라 하겠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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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여 년 전 도망가버린 아내와 어린 딸을 찾아 먼 길을 찾아온 산밍(한 산밍)을 맞이하는 건 날강도나 다름 없는 마술쇼였습니다. <스틸 라이프>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이 짧은 씨퀀스는 그 자체로 하나의 단편이라 할 만큼 중국 사회의 현실을 그대로 투영하는 장면이라 하겠습니다. <스틸 라이프>를 지배하는 분위기는 이 마술쇼와 크게 다를 바가 없지요. 수 천 년을 살아온 삶의 터전으로부터 사람들은 내몰려 나가고 생존을 위해 자신들의 저임금 노동력으로 건물들을 하나씩 부수어야만 합니다. 산밍과 함께 또 한 명의 주인공인 셴홍(자오 타오)은 남편을 만나러 산샤에 왔지만 이별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마침내 아내와 상봉한 산밍은 아내를 데리고 고향으로 가고자 합니다. <스틸 라이프>가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장면은 1만 위안이라는 거금을 요구하는 선주의 제안에(산밍의 하루 방 값이 1.5위안, 철거 노동으로 버는 하루 품삯이 40~50위안이었습니다) 1년의 기간을 달라며 수락하는 산밍의 단호함이었습니다. 고향에서 탄광일을 하면 200위안을 벌 수 있다지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삶입니다. 그런 삶을 마다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산밍의 모습이 가슴을 뭉클하게 하더군요. 그 유명한 <스틸 라이프>의 마지막 장면은 UFO가 날아다니고 사원이 로케트처럼 발사되는 장면 만큼이나 초현실적인 배치라고 하겠습니다. 산밍과 다른 이들의 삶이 마치 그와 같이 위태롭다는 은유적인 표현일테지요. 현실 비판이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담는 자체가 큰 위로이기도 하겠습니다만 저는 이름 없는 인생들에 대한 위대한 긍정을 읽을 수가 있었습니다. <스틸 라이프> 이후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무용>도 그 연장선 상에서 만들어진 작품이라 생각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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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은 <스틸 라이프>의 모티브가 된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만들어진 과정 상 <스틸 라이프> 보다 앞서기 때문에 <동>을 먼저 봐야한다는 것이 지아 장커와 정성일씨의 말이었습니다만 어찌 되었거나 저는 <스틸 라이프>를 본 이후에 <동>을 봤습니다. 지아 장커가 원래 베이징 영화학교를 들어가기 전에 미술학도였습니다. <동>에 출연하는 리우 샤오동은 <세계>에서 배우로도 출연했던 인물인데요 아마도 지아 장커와 친구 사이인 것 같습니다. <동>은 리우 샤오동이 중국 샨시와 태국 두 곳에서 작업하는 모습과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입니다. IMDb의 관객 코멘터리에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악평이 있긴 했습니다만 저는 <스틸 라이프>를 먼저 보았기에 나름대로 일관된 메시지와 차기작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스틸 라이프>이 주인공 산밍은 리우 샤오동이 샨시에서 그린 그림의 모델이었습니다. 실제 그곳에서 철거 노동을 하던 일꾼이었던 거죠. 그들이 일하는 장면은 <스틸 라이프>에서 그대로 재사용되기도 했더군요. 일하던 중에 사고사를 당한 한 인부의 시체를 가족들에게 인계하는 과정에서 리우 샤오동이 눈물을 흘립니다. 중국의 젊은 현대 예술가들의 모습을 담는 연작으로서 <동>과 <무용>은 서로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작업이 지아 장커 자신의 영화 작업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리우 샤오동이 태국으로 건너가 젊은 여성 모델들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리는 후반부는 언듯 샨시에서의 작업과는 이질적인 것으로 보입니다만 리우 샤오동의 인터뷰를 통해 결국 그 일관성이 드러납니다. 모든 인간은 존중받아야 한다. 지아 장커의 작품들이 가치를 지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인정받고 있는 것은 중국 정부에 대한 날선 비판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애정과 그 존엄성에 대한 믿음이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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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스틸 라이프>를 극장에서 봤으면 좀 더 감정적인 몰입이 되었을까요. 안방 극장이라 너무 차분하게만 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아 장커의 영화가 일부러 관객의 감정을 잡아 흔드는 일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제 나름의 감상문을 다 썼으니 정성일씨의 음성 해설을 들으며 한번 더 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