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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님은 먼 곳에 - 당신이 거길 왜 갔나요


결론적으로 이준익은 영화를 대중적으로 아주 잘 만드는 감독이다. 어떤 소재를 쥐어줘도 대중의 코드에 어울리도록 판을 짤 줄 아는 능력을 가졌다. 그렇다고 대중이 좋아할만한 소재들을 골라 만드는 감독은 아니다. 오히려 그의 전작들은 흥행과 멀어보이는 소재들을 다루고 있었다. 영화판에서는 그다지 반응이 좋지 않은 사극 <황산벌>, 동성애 코드에 맞춘 <왕의 남자>, 한물간 가수와 매니저의 우정을 그린 <라디오 스타>에 기력 없는 아저씨들을 전면에 등장시킨 <즐거운 인생>까지 솔직히 '땡기는' 이야기들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준익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사람들을 매표소로 끌어들이는 영리하고 운 좋은 감독이다. 한국 관객이 스크린에서 보고 싶어하는 '무엇'을 정확히 읽어낼 줄 알고, 그것을 표현할 줄 안다는 의미다. 그리고 소통 역시 게을리 하지 않는다. 때문에 그는 현재 충무로에서 감독의 색깔과 대중의 기호 사이의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몇 안 되는 감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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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여섯번 째 영화 <님은 먼 곳에> 역시 이준익 감독의 균형감각을 유감 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베트남전에 대한 감독의 철학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도 관객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정치적으로 심각하게 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 사건을 가지고 만든 이 '낯선 멜로드라마'는 제목과 줄거리에서  풍기는 신파적 감성에도 불구하고 이전 전쟁영화에서 느끼기 힘들었던 세련된 영상과 구성을 보여준다. 전쟁영화, 음악영화, 멜로드라마에 로드무비 형식까지 복잡한 장르적 구성을 깔끔하게 엮어내면서 베트남 전쟁을 한국의 처지에서 진실성 있게 그려내고 있는 점이 이 영화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다.

영화에서 베트남으로 떠나는 세 종류의 인물이 등장한다. 상길은 군대에서 친 사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터로 끌려가고, 순이는 그런 상길을 만나기 위해 주소 하나 들고 무작정 베트남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돈'을 벌기 위해 배에 오른 정만과 그의 밴드 멤버들이 있다. 상길과 정만은 1970년대 초반 베트남으로 떠났던 전형적인 인물들이다. 사지에서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던 상길과 노래로 돈을 벌어야 했던 정만. 그들은 모두 외화벌이를 위해 베트남으로 떠났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상길이 국가를 위한 외화벌이 수단으로 떠났다는 점과 정만이 순수 개인적인 목적으로 갔다는 점만 차이가 있을 뿐이다. 어찌됐든 상길과 정만이 상징하는 그 시대의 인물들이 메고 있던 십자가는 외화벌이였다.

하지만 순이는 다르다. 당시에도 순이와 같이 남편을 찾기 위해 베트남을 찾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도 4대 독자의 씨를 말릴 수 없다는 시어머니의 반 협박에 의해서는 말이다. 가장 영화적인 인물로 그려지는 순이는 이런 점에서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환유한다고 볼 수 있다. 남편, 애인, 친구, 가족을 베트남으로 보내고 한국에 남은 사람들이 곧 순이가 되는 것이다.(순이가 여성이어야 했던 이유다.) 과연 그들이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서 우리와는 아무 원한도 없는 베트남인들과 총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준익 감독은 순이를 통해 그 물음에 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영화의 마지막, 말이 아닌 순이의 행동으로 드러난다. 천신만고 끝에 마주선 상길에게 순이는 아무말 없이 그의 뺨을 연신 내려친다. 그리고 상길 역시 아무 말 없이 순이의 손을 받아낸다. 순이의 행동이 전하는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당신이 도대체 이곳에 왜 와 있어야 하는지"를 묻는 원망이 아니었을까? 그토록 순이에게 '화끈한 것'을 요구했던 정만도 마지막 순이의 변화에 절망한다. 그리고 용득이 달러를 불태우는 것을 그냥 지켜보고만 있는다. 정신 마저 겁탈당하고 벌어온 달러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지 감독은 직설적으로 묻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 없는 전쟁에 왜 우리가 갔었야 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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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은 미국과 베트남 사이의 전쟁이었기는 했지만 한국이 참전하면서 우리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사건이다. 아직까지 베트남전 참전을 둘러싼 논쟁이 마무리되지 않았고, 고엽제 부작용과 베트남 양민 학살 문제 처럼 현재진행형이다. 하지만 영화 쪽에서 베트남전을 다루는데 게을렀던 것이 사실이다.(하긴 베트남전 뿐이겠는가) <하얀 전쟁>이 어렴풋이 기억날 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준익 감독의 <님은 먼 곳에>는 70년대의 베트남전쟁이 현재의 시점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영화적으로 풀어보는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후한 점수를 받을만 하다. 그의 정치적 판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선 그의 도전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특히 주인공 순이가 처한 상황이 그렇다. 순이가 왜 베트남을 가야하는 이유는 개연성이 있다기 보다는 상당히 억지스러운 면이 있다. 당시 그런 상황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겠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과 맞지 않은 설정이었다. 때문에 순이가 끝까지 밴드를 이끌고 호이안으로 가서 남편을 만나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정만으로 나온 정진영의 극적인 변화 등도 매끄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감독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메시지와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은 영화적 구성은 이 영화를 애정을 갖고 볼 수 있는 이유다. 특히, 순이와 상길의 병렬적 이야기 전개와 마지막 그들의 만남은 극을 이끌면서 긴장을 풀지 않게 한다. 영화적 상황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70년대의 히트곡들과 더불어 정진영, 엄태웅을 비롯한 조연배우들의 가볍지 않은 연기와 '수애'라는 보물같은 배우를 발견한 것도 영화의 빠질 수 없는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