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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여기보다 어딘가에 (Nowhere To Turn,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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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얘기를 여기저기서 듣고 그야말로 기대치를 바닥으로 내려놓고 보았던 덕분인지 나름대로 편안한 가운데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불과 1억 예산의 HD 영화라고는 해도 최소한 영화를 보는 도중에 실소를 자아낼 만큼 어설프게 만들어진 영화는 아니더군요. 소위 '학생 영화'로 치부하기에는 수준이 높고, 그렇다고 잘 만든 상업영화들과 경쟁하기에는 만듬새의 문제라기 보다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흡입력이라는 측면에서 아무래도 밀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정도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관객 취향에 따라서는 이처럼 약간씩 어색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관습적이지 않은  캐릭터들과 내러티브에서 좀 더 매력을 느낄 소지도 없지 않습니다.

흔히 캐논 카메라가 사실적인 색감 보다는 다소 과장된 화려한 색감의 사진을 만들어낸다고 알려져 있는데 <여기보다 어딘가에>를 보면서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부분이 바로 '캐논 카메라로 찍은 영화인가'1) 싶은 화면이었습니다. 당연히 화려한 세트 미술을 과시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고 대체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담고 있음에도 그다지 칙칙하게 보이지 않는 이유는 전반적으로 컬러가 약간 과장되어 보이는 화면 때문, 또는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최근에 개봉한 또 한 편의 저예산 청춘 영화 <달려라 자전거>(2008)가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느낌의 영상으로 일관했었다면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다분히 도회적이고 명징한 시각적 이미지의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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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성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달려라 자전거>가 어딘지 모르게 허진호 감독의 영화와 닮아 보였던 것은 주인공 가족들의 집이 마루가 있는 한옥 구조인데다가 비 오늘 날 마당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가족들의 모습을 담는 등의 유사점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요, 그런 점에서 이승영 감독의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서민형 아파트에서 주인공 수연(차수연)이 가족들과 격렬하게 부딪히는 장면으로부터 시작하며 똑같이 20대의 청춘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임에도 정서적으로는 확연한 세대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청춘을 과거형으로 돌아보며 타자화된 시선으로 회고하는 기존 청춘 드라마들의 낭만적인 정서가 배제되었다고 할까요. 주인공들의 동기를 가족이나 주변 환경으로 돌려 설명하지 않고 그 인물 스스로에게서 찾아내고 있는 점 역시 기존의 청춘 드라마들과는 다른 점입니다.

수연이나 동호(유하준)의 캐릭터를 다루면서 낭만적이기는 커녕 그 흔한 겉멋든 시각 조차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 역시 <여기보다 어딘가에>의 독특한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대학 전공도 아닌 그저 음악을 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 하나 외에는 아무런 낙관의 여지가 없어 보입니다. 포스터에서 보여지는 근사한 이미지는 아마도 주인공의 꿈에 불과하지 싶을 정도로 주인공의 실제 캐릭터는 몹시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데다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지경입니다. 차라리 코미디 영화의 주인공들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수연은 자주 구영탄 표정으로 입을 헤 벌리고 있고 동호는 입을 똥구멍처럼 오므리고 있습니다.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청춘 음악 영화의 전형에서 벗어난 사실상 코미디 영화에 더 가깝습니다. 노골적인 미국식 코미디는 아니지만 루저 계열의 주인공들을 내세운 점에서 조금 유사하기도 하고 그래서 한국 영화로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정서의 청춘 영화가 되었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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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보다 어딘가에>의 방점은 마침내 음악 경연대회 무대에 오른 수연이 갑작스럽게 연주하기를 포기하는 장면에 놓여있습니다. 일찌감치 돈 벌기에 나선 친구와 달리 현실 감각고는 일체 없는 데다가, 그저 음악을 하고 싶다는 꿈 하나로 우격다짐식의 고생을 해왔지만 막상 그 기회가 다가온 순간에는 힘 없이 물러설 수 밖에 없을 만큼 연약하고 두려움만 가득한 청춘입니다. 만약 수연과 동호가 무대에 올라 멋진 연주를 펼치고 우승을 차지하는 식으로 전개가 되었다면 이 영화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도대체 이런 걸 뭐하러 만들었니' 하는 영화가 되고 말았을테지만 <달려라 자전거>와 마찬가지로 <여기보다 어딘가에>의 중심은 멜러나 음악이 아니라 그 나이 또래의 삶 자체를 드러내는 데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일부 현실적인 부분도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극단적인 묘사로 일관하고 있다 할 수 있는 수연의 캐릭터는 대체로 관객들의 호감을 사기 보다는 쟤는 도대체 왜 저러고 있나 싶은 수준이지만 결국 자신이 꿈 꿔왔던 길로 가는 길목에서 스스로 좌절하는 연약함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관객들과의 공감대를 놓는 데에 성공하고 있습니다.2) 설령 영화 속 주인공들과 같이 해보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두려움과 좌절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없을테니까요. '세상의 중심은 바로 나'라는 슬로건을 악용하듯 살고 있지만 자신의 꿈 만큼이나 거대한 두려움 앞에 눈물을 흘리고 마는 수연의 모습은 그 시절 젊음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여기보다 어딘가에>는 분명 청춘 드라마의 전형성을 탈피해 독창적인 면모를 갖춘 작품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객석의 폭넓은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에까지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영화가 반드시 희망이나 위로를 선사해줄 필요는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오직 여행 가방에 막연한 꿈 하나만 담고 거리를 방황하는 젊음을 마음 속 깊은 곳에 담아두고 싶어하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을테니까요. 영화가 관습적이지 않다는 것은 분명 미덕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관습적이지 않음' 그 자체만으로 좋은 영화가 되기는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남이야 읽던 말던, 좋아하든 말든 상관 없을 수도 있는 책 한 권 쓰는 일이 아닌 이상, 영화는 아무리 적은 예산의 작품이라 하더라도 그 이상의 무언가를, 특히 상영관까지 찾아와준 관객들에게 남겨줄 수 있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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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캐논에서 만든 디지털 영화용 카메라가 아니라 그냥 똑딱이 디카를 얘기하는 겁니다. 아마도 바이퍼 카메라 같은 걸로 촬영해서 보정 작업을 해서 만든 화면이겠지 싶네요.

2) 단순히 두려움이나 연약함 때문이 아니라 어떤 '깨달음'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수연은 자신을 지탱해온 그 꿈이라는 것에 대한 현실 인식의 순간을 무대에 올라서기 직전에서 맞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에필로그에서도 여전히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그거 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