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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소리아이> 렌즈의 윤리

<소리아이> 렌즈의 윤리 

한국;2008;100min;color;Dacumentary
Director:백연아
Cast:박수범, 박성열

<렌즈의 윤리>를 대표하는 한 가지 사건이 있다. 1994년 케빈 카터(Kevin Carter)의 사진 <독수리와 소녀>. 수단 남부의 한 지역을 가던 중, 뼈만 앙상하게 남은 굶주린 여자 아이와 그 아이의 죽음을 몇 걸음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독수리 한 마리를 카메라에 담은 그는 이 사진 한 장으로 그 해 퓰리처 상을 받았다.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아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진으로 뉴욕타임즈 1면에 실리며 사회에 큰 반향을 몰고왔다. 하지만 케빈 카터는 수상 3개월 뒤 편지 한 장을 남기고 자살했다. 아이를 구하는 것보다 먼저 셔터를 터뜨린 작가에게 쏟아진 비난 때문이었다. 렌즈의 윤리를 전면으로 등장하게 한 사진 한 장. 이 사건은 직업인으로서 작가가 카메라가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를 넘어 한 인간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계기가 됐다.


똑같은 사례로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지금 극장에서 개봉 중인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는 아니다. 사전 지식이 없이 잘 만든 다큐멘터리 한 편, 소리 잘 하는 아이들의 구성진 소리 한 번 듣기 위해 극장을 찾은 사람들에게 백연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소리아이>는 예상과 전혀 다른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게 만든다. 제대로 뒤통수를 얻어 맞고 복잡한 감정이 쏟구친다. 불편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욕을 해주고 싶다가도 무엇이 옳은지에 대한 도덕적 아노미에 빠지기도 한다. 영화가 끝난 후 씨네큐브에서 진행된 영화 평론가 이동진씨, 백연아 감독과의 씨네토크도 복잡한 감정을 느낀 시선들이 공격적으로 교차하면서 영화 속 불현함을 그대로 재현했다. 결론적으로 감정의 극단을 경험하게 만드는 여감독의 데뷔작은 하고 싶은 말도, 듣고 싶은 말도 많게 하는 논쟁적인 영화임에 틀림없다.

시쳇말로 낚인다는 말대로 아주 제대로 낚은 이 영화가 가진 가장 큰 인력(引力은) 탁월한 케이스의 선택이다. 다큐멘터리의 주인공이 되는 두 명의 소리아이 수범이와 성열이는 여러가지로 극단에 선 인물들이다. 수범이는 전형적인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있는 신동이다. 전용 별장이 있을 정도의 나름 사는 집안에서 소리를 좋아하는 아버지의 열성적인 바짓바람으로 어려서부터 유명한 소리꾼에게 레슨을 받으며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소리에 대한 아버지의 열정과 개인적인 애정이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수범이는 어려서부터 수 차례의 대회에서 수상하며 두각을 내는 신동이 됐다. 주변 모든 환경이 그가 소리하기에 불편함이 없다. 그래서 그의 얼굴과 소리에서는 왠지 모를 편안함과 안락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성열이는 소리를 좋아한다는 점만 빼고는 모든 면에서 수범이와 대척점에 있다. 그는 정식으로 소리를 배운 적이 없다. 그저 예전 소리꾼이었던 아버지에게서 귀동냥으로 배운 소리가 전부이다. 무슨 사연인지 유명한 소리꾼이 되지 못한 아버지 밑에서 성열이는 생활을 하기 위해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시골 마을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소리를 들려주고 물건을 판다. 관심을 끌기 위해 반짝이 옷을 입고 '뽕짝'을 부르는 일도 다반사다. 소리 교육은 커녕 생활을 위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성열이는 그래도 그 생황에 만족하며 산다. 늘 취기가 올라있는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은 매와 욕 뿐이지만 성열이는 아버지와 소리를 가장 사랑한다고 말한다. 9살 아이의 언어가 아닌 어른의 언어를 구사하는 성열이는 이미 아이가 아닐지 모른다. 그의 얼굴과 소리가 이것을 증명한다. 

두 아이가 처한 정반대의 현실은 다큐멘터리지만 극적 구성을 이끌어내면서 극의 흥미를 유발하는 요소가 된다. 마치 흥미로운 미니시리즈 1, 2 편을 본 기분이 들었다. 다음 주 부터 성인이 된 수범이와 성열이가 진정한 명창 자리를 놓고 극적 대결을 벌인다는 스토리를 보게 될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 만큼 감독은 수범이와 성열이를 교차로 편집하면서 관객을 극으로 끌어들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관객은 동화됨과 동시에 극에서 의식적으로 튕겨져 나오는 경험을 한다. 성열이를 비추는 카메라에 불현함을 느끼면서 렌즈의 시선을 거부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동학대로까지 비춰질 수도 있는 성열이와 아버지의 관계를 보며 관객들은 카메라가 가진 윤리적 문제의식에 전면적으로 물음표를 던지게 된다. "그 장면에서는 카메라를 끄고 말렸어야 하는거 아닌가요?", "성열이를 위해 무언가를 했어야 하지 않나요?" 감독을 향해 던져진 많은 질문들은 대다수 카메라를 잡고 있었던 감독을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꿈이 이식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수범이와 성열이를 안쓰러워 했다. 그것이 현 시대 교육을 받는 것이 아닌 '당하고' 있는 모든 아이들이 처한 공통의 문제임이 분명하다. 영화 콘텐츠 자체가 가지고 있는 내용을 넘어선 윤리의 문제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그런 점에서 무리가 없는 측면이 있다. (이런 주제를 다루고 있는 다큐멘터리일수록 케빈 카터의 사진처럼 윤리의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감독은 수범이와 성열이가 처한 상황 속에서 진정으로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어떤 '하나'라고 예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두 아이가 결국에는 자신의 꿈을 찾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성열이는 작년 SBS 스타킹에 출연한 이후 지리에서의 정식 소리 교육을 받고 있다.) 영화를 찍은 감독의 대답도, 관객의 반응도 모두 옳고 그름으로 가를 수 없다. 아버지의 꿈이 이식됐다는 점에서는 수범이와 성열이의 차이는 없고 성열이가 더 좋은 환경에서 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것이 무리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특히 성열이의 경우)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카메라를 던지고 아이를 구해 정식교육을 받도록 현실적인 조치를 취하는 것이 옳았을까? 아니면 아버지를 경찰이든 어디든 신고를 하고 성열이를 보호시설로 보내는 것이 옳았을까? 나조차도 어느 쪽에서 서야 하는지 당장 답이 무엇인지 잡히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대안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답은 아니다. 분명한 것은 성열이가 자신의 꿈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 주는 게 최선이라는 것이다.

한 편의 영화에서 비롯된 영화 외적인 문제가 영화 자체를 넘어서는 경우는 왕왕 있다. <소리아이>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두 아이의 미래를 대단히 궁금해 할 것이다. 모두 발전해서 한국을 대표하는 소리꾼이 되었으면 하는 기대를 갖고 말이다. 두 아이가 '지금'을 기회로 더 나은 '미래'를 꿈꾸길 바랄 뿐이다. 
 

영화가 끝나고 자료 검색을 통해 감독이 다니얼 고든의 다큐멘터리 <어떤 나라>에 참여한 사실을 알았다. 왠지 <소리아이>를 바라보는 감독의 시선에 약간은 답을 얻은 듯하다. <어떤 나라>는 북한이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이 시시했다고 평가했다는 자신감에 배경이 되는 대집단 체조와 예술공연(아리랑)에 참여하는 두 여학생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이다. 국내 유명한 한 여류소설가가 아리랑은 보고 그 공연에 참여한 아이들을 동정하는 듯한 발언을 해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국가와 체제, 지도자에 의해 희생되지만 그 사회 속에서 공연에 참여하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믿고 사는 아이들(어떤 나라 속의 아이들)과 부모의 꿈이 이식된 상태에서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살아가지만 아버지와 소리를 가장 사랑한다는 아이(성열이)가 왠지 다르지만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리한 감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