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밤과 낮 / 가짜 하늘의 슬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성남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을 본다. 성남은 쿠르베의 그림 중에서 <돌깨는 사람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는 <돌깨는 사람들>에 있는 고된 노동의 현실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는 법을 피해 프랑스로 도망왔고, 식당에서 일이라도 해 볼까 생각하지만 식당 주인이 그의 이력서를 가지고 있는 게 싫어서 포기한다. 그는 파리에서는 그림을 그리지 않지만, 그 전까지 주로 하늘의 구름을 그려 온 화가이다.

그렇다면 그가 노동을 통해 모사하는 하늘의 의미는 무엇일까. 엘리아데의 [성과 속]에 따르면 인간은 성스러운 장소를 통해 세계의 중심을 잡을 때에만 자기의 실존을 긍정할 수 있게 된다. 종교적 인간은 세계의 자연상으로 초자연적인 것을 파악하는데, 자연은 항상 그것을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연 중에서 특히 하늘은 높고, 무한하고, 영원하고, 강력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현재하는 상징이다. <밤과 낮>의 성남은 하늘처럼 성스러운 것에 끌린다. 그는 아이나 새처럼 여린 존재를 보면 희망과 구원을 발견한 듯이 기뻐하고, 유정이 걸인에게 샌드위치를 사주는 모습에서 사랑을 느낀다. 혹은 사랑을 느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늘은 항상 거기에 있다는 점에서 대타자와도 같다. 성남 또한 자유롭지 않다. 옛 애인 민선의 욕망을 거절하게 만드는 성경 속의 하느님이나, 북한 유학생에 놀라 도망치게 만드는 반공 이데올로기 등으로 그는 언제나 불안에 떨고 있다. 성남이 파리에 처음 도착했을 때 담뱃불을 빌리던 외국인은 그에게 조심하라고 경고하지만, 그는 두려워하면서도 무엇을 조심해야 할지 모른다. 미쳤다고 후회한 후에도 변하지 않는 것이다. 차이와 반복을 통해 나타나는 건 관성의 힘일 뿐이다. 사실은 전혀 성스럽지 않으며, 세속적인 욕망과 안정적인 삶을 추구하는 인간형인 성남을 묘사하면서, 홍상수는 인간성 속의 비인간적인 핵심을 드러낸다. 그의 사소한 악행들과 임신했을지도 모르는 유정에게서 도망쳐 한국에 있는 아내에게 돌아온 사실, 그리고 이로 인한 죄책감은 꿈속에서 여자에게 욕을 퍼붓는 것으로 전이된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다시 파리에 돌아간다면 그는 민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유정의 얼굴을 못 알아보지 않을까. 꿈이야말로 진실의 형식이다.

라캉이 X라는 이름으로 소유했던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이 회화의 외설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낸 것처럼, 홍상수도 <밤과 낮>에서 위선에 대해 말하고 있다. 아내의 거짓말을 통해 성남이 도달하게 된 푹신한 침대야말로 사상누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기 때문에 침대 위에 걸린 그림 속 하늘은 숭고한 대상이 아니라 어떤 메시지나 암호도 없이 텅 빈 것처럼 보인다. 가짜 하늘이 연결되어 있는 장소는 폐소공포증이 연상될 정도로 꼭 닫힌 그들의 침실과 위선적인 현실 밖에 없다. 아마도 성남은 진짜 하늘을 결코 그릴 수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