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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더 레슬러> 삶의 온전한 기록, 뒷모습


<더 레슬러> 삶의 온전한 기록, 뒷모습


France, U.S.; 2008; 109min; Drama; Color
Director: Darren Aronofsky
Cast: Mickey Rourke, Marisa Tomei, Evan Rachel Wood

누군가의 현재를 알고 싶다면. 그 사람의 어디를 봐야 할까? 물론, 여기서 현재는 순간이 아닌 과거를 통한 현재이다. 과연 한 사람의 인생을 가장 함축적으로 응집시켜 놓은 곳이 어디일까? 미국의 16대 대통령 링컨은 "나이가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말을 뱉은 지 한 세기하고도 반이 지났다. 지금은 칼과 주사기로 무장한 성형외과 의사들이 있다. 이들이 "당신의 인생을 만들어줄 수 있다." 며 덤벼들지 모를 일이다. 얼굴이 아니라면 재테크 포트폴리오 만큼 확실한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주식은 얼마나, 펀드는 얼마나, 부동산은 얼마나, 은행 예금은 얼마나 가졌는지가 시대가 시대인만큼 그 가늠의 기준이 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돈은 언제나 부분일 뿐이다. 중요하기는 하지만 전체적인 삶의 만족도와 언제나 비례 관계인 것은 아니다. 개인을 총체적으로 그려내는데 한 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다른 답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왕가위는 불혹을 넘기고 영화 <화영연화>를 만들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담은 이 영화에서 그는 유독 장만옥과 양조위의 뒷모습에 카메라를 고정시킨다. 그리고 묵묵히 그들의 뒤를 따른다. 중년을 넘긴 남녀가 겪는 이별의 상처와 사랑의 떨림,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이별은 인물의 얼굴에서 묻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국수통을 들고가는, 택시 뒷자석에 나란히 앉은, 앙코르와트에 비밀을 묻는 뒷모습에 오롯이 담겨 있다. <밀양>의 신애도 그렇다. 이창동 감독은 신애가 지고 있는 버거운 삶의 십자가들을 굳이 주저리주저리 말로 떠들지 않는다. 그녀가 밀양에 내려왔을 때도, 아이를 잃어버렸을 때도,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하염없이 밀양의 골목골목을 배회하는 뒷모습을 따를 뿐이다. 표정은 감출 수 있다. 하지만 온전히 타인에게만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뒷모습은 거짓이 불가능하다. 신애의 뒷모습은 그대로 그녀의 과거이자 현재인 것이다.

꼭 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다. 아빠와 엄마의 뒤를 걷게 됐을 때, 문득 그들의 뒷모습에서 늘어난 얼굴의 주름보다도 깊은 세월의 흔적을 감지하게 되는 것은 특별한 경험이 아니다. 뒷모습은 그렇게 자신이 살아온 삶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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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의 <더 레슬러>는 쉰을 넘긴 프로레슬러의 뒷모습으로 영화를 시작한다. 막 게임을 마치고 의자에 걸터 앉아 가쁜 숨을 내쉬는 이 한 장면으로 주인공 랜디(미키 루크)에 대한 부가적인 설명은 사족이 될 뿐이다. 그의 뒷모습은 프로레슬러로서의 그의 삶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요약본이자,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프로레슬링은 TV가 만들어낸 최고의 쇼였고, 랜디는 현란한 기술로 그 쇼의 주인공이 됐다. 그에게 열광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스타를 신문 첫장에 담기 위해 공격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대는 기자들이 있었다. 쥴스 데이신의 1950년도 영화 <밤 그리고 도시>에는 프로레슬링을 사기라고 경멸하는 노장 레슬러 그레고리우스가 등장한다. 그는 노쇠한 몸으로 한껏 인기를 끌던 프로레슬러 크리스토를 넉다운 시키지만 결국 그 자리에서 눈을 감는다. 그가 만약 얼마를 더 살았다면 이 '사기쇼'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고 더 독한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프로레슬링도 열흘 붉은 꽃은 아니었다.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는 '쇼'였던 이 변종 격투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시들해졌고, 자연스레 링 위의 스타들도 빛을 잃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K-1과 같은 좀 더 과격하고 리얼한 격투기와 새로운 스타들의 차지가 됐다.

한물간 스타들은 젊은 날의 영광을 안고 살아간다. 누군가는 중고 자동차 판매원과 같은 직업인이 됐고, 누군가는 여전히 지방의 행사장을 기웃거리며 조악한 쇼를 펼치고 있다. 그리고 후자에 <더 레슬러>의 주인공 랜디가 있다. 프로레슬링과 자신의 인기가 끝이 없을 것이라 믿었을 그는 미래에 대한 준비도 없이 호시절을 즐겼을 것이다. 지금 그에게 남은 것은 방값도 내기 힘든 주머니와 온갖 약의 도움 없이는 링 위에 오르기도 힘든 늙고 병든 반 백년을 산 몸 뿐이다. 유일한 혈육인 딸에게 버림 받은 지는 오래이고, 마트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지탱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 링 위를 호령했던 랜디로서의 기억 뿐이다. 그는 2000년대가 아닌 여전히 1980년대를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을 '로빈슨 람진스키'가 아닌 랜디로 불러달라고 끊임없이 요구하는 이유이다. 앙드레 김이 김봉남이 아니듯, 그도 람진스키가 아닌 랜디이고 싶기 때문에...


과거의 화려한 기억을 안고 궁색한 현재를 살아가는 프로레슬러의 외로움은 그의 '뒷모습'에서 그대로 묻어난다. <더 레슬러>의 카메라는 집요할만큼 랜디의 뒤를 쫓는다. 그가 링 위에 오를 때도, 경기가 끝나고 락커로 돌아올 때도, 일을 하기 위해 마트에 들어설 때도 언제나 보게 되는 건 그의 뒷모습이다. 그리고 뒷모습은 주름진 그의 얼굴보다도 더 랜디의 외로움을 정직하게 보여준다. 스테로이드가 만들어 준 근육과 어깨의 주름에는 영웅의 자리에서 내려온 중년의 외로움이 깊게 베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다름 아닌 랜디 자신의 삶의 기록이다.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의도적으로 느껴질만큼 랜디의 얼굴을 비추지 않는다. '과연 미키 루크가 얼마나 망가진 것인가.'를 확인하고 싶은 생각에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의 시작부터 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는 뒷모습만 비출 뿐이다. 간간히 보여지는 얼굴은 링 밖에서 누군가에게 보여지기 싫은 랜디를 배려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우는 (내 기억이지만) 한 장면이 있다. 아버지를 증오하는 딸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랜디의 모습이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랜디의 눈물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은 얼굴의 주름을 타고 흐른다. 그리고 뒷모습을 따르듯 카메라는 랜디의 얼굴을 응시한다. 처음으로 '영웅 랜디'가 아닌 '인간 람진스키'와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 눈물은 딸에게 아버지로서 책임을 못한 것에 대한 속죄이자, 외로움과 병든 몸 밖에 가진 것이 없는 자신에 대한 치유의 의미이다. 심장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부터 랜디는 익숙한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자신과 많이 닮아 있는 스트리퍼 캐시디와 잊고 지냈던 딸 스테파니를 찾아간다. 혼자가 아닌 자신도 누군가의 연인이자, 누군가의 아빠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레슬링이 아닌 다른 걸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데 익숙하지 않다. 한 번의 실수로 그의 눈물에 어렵게 마음을 열었던 딸에게 다시 버림을 받는다. 그리고 랜디는 자신이 있어야 할 곳, 자신의 세계로 돌아온다. 그 끝을 알면서도 말이다.


<더 레슬러>를 대런 아노로프스키의 영화가 아닌 미키 루크의 <더 레슬러>라고 흔히들 말한다. 그 만큼 미키 루크의 역할은 영화 속에서 절대적이다. 지금까지 영화의 메시지와 배우, 내용이 이 정도로 혼연일체를 이뤘던 작품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이다. <나인 하프 위크>, <와일드 오키드> 등 최고의 섹시 큐트 가이였던 그의 늙은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와 청년 시절을 함께 했던 사람들에게는 분명 자신을 비추는 영화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난 그의 영화를 한 철이 지나 비디오 가게에서 아빠 이름 대고 몰래 빌려본 이후 세대이다. 그럼에도 킴 베이싱어와 침을 꼴깍이게 만들었던 그 베드신의 주인공이 미키 루크라는 사실만으로도 공감에는 어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랜디가 마트 정육코너의 랜디가 아닌 프로레슬러로서 랜디 였듯이, 사람들은 여전히 미키 루크의 이름에서 그의 지난한 과거보다도 1980년대 스크린 속에서 화려한 그의 모습을 기억한다. 어렵게 스크린으로 돌아온 만큼 랜디의 우울하고 쓸쓸한 뒷모습이 아닌 미키 루크의 화려하고 당당한 뒷모습을 보게 될 수 있길 바란다.

<더 레슬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마리사 토메이가 역할을 맡은 캐시디이다. 쉰을 넘긴 프로레슬러가 어색하듯 마흔이 넘은 애엄마 스트리퍼도 어색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 둘의 캐릭터는 어쩐지 닮아 있다. 스테로이드가 만든 랜디의 근육과 늘어지기 시작한 그녀의 몸이 닮아 있고, 그들의 얼굴 주름에 묻어나는 삶의 어두움이 닮아 있다. 그래서 랜디는 캐시디에게 친구 이상의 감정을 갖는다. 캐시디도 랜디 앞에서는 '팸'이고 싶어하지만 아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그를 손님 이상으로 대하기 힘들다. 마리사 토메이는 자신과 비슷한 랜디에게 마음이 가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버거워하는 캐시디를 완벽하게 그려낸다. 미키 루트가 랜디였듯, 마리사 토메이 역시 영화 속에서 캐시디였다. 랜디의 이야기와 조화를 이루며 영화의 감정을 풍부하게 하고, 미키 루크가 이끌어 가는 절절한 감정에서 한 템포 쉬어갈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실제 40대 중반을 넘긴 나이에 스트리퍼의 역할에 도전한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공교롭게도 미키 루크와 마리사 토메이는 그들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모두 나란히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물을 먹었다. 이 영화 속 루저들이 시상식에서나마 승자가 되는 모습을 보기를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현실에서도 루저들의 손은 들어주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꽝"이 나오면 꼭 따라 붙는 말이 있지 않은가. "다음 기회에" 그게 위로이든, 희망이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