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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어떤 개인 날> Listen to her Stories


<어떤 개인 날> Listen to her Stories


Korea; 2008; 87min; Drama; Color
Director: 이숙경
Cast: 김보영, 지정남, 박혁권

2009년 3월 13일 금요일, 정말 '어떤 개인 날'이었다. 전날 밤부터 그리고 아침까지 내리던 비는 오후가 가까워질 쯤 잦아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검은 구름을 머금은 흐린 하늘이었지만, 분명 비가 멈춘 후의 하늘이었다. 그 구름들의 틈을 비집고 곧 뜨겁게 비출 태양을 어딘가 숨겨 놓은 그런 개인 날이었다. 점심을 급하게 챙겨먹고 압구정의 한 극장을 찾았다. 날씨와 너무도 어울리는 제목의 영화 <어떤 개인 날>의 티켓을 끊었다. 비가 온 다음 늘상 찾아오는 평범하기 그지 없는 3월의 개인 날, 영화는 어떤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우습지만 영화에서는 단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는다. 아직 두툼한 코트에 목도리를 두르고 있는 영화 속 인물들은 여전히 겨울을 살고 있다. 그들에게 비가 오지 않고 찾아오는 '개인 날'은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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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씨 만큼이나 그들은 몸을 한껏 움크리고 있다. 그리고 주인공 보영의 표정 역시 잔뜩 흐린 겨울 하늘을 닮아 있다. 뭔가 모를 불만에 가득찬 얼굴을 한 그녀는 모든 게 짜증난다. 자신의 차를 막아선 택배 직원도, 원고 독촉을 하는 출판사 사장도, 잔뜩 어질러 놓고 치울 생각을 하지 않는 어린 딸 아이도 모두 짜증이 난다. 보영의 표정, 말투, 걸음걸이 어디에서도 행복이나 기쁨의 흔적은 자취를 감춘 듯하다. 오직 1년 전 이혼을 하고 혼자 아등바등 딸을 키우며 살아가기가 버거울 뿐이다. 하지만 좁은 방에서 노트북, 술과 담배에 싸여 딸아이 등교도 챙겨주지 않는 그녀에게 엄마라는 이름이 어색하다. 혼자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딸이 오히려 어른스러워 보인다. 그녀의 직업은 작가... 이름만 작가일뿐 이런저런 글쓰기 강의로 벌이를 하고 있을 뿐이다. 삶에 치여 글쓰는 흉내만 내고 있는 그녀에게는 작가라는 직업도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인다. 수강생에게 마음을 편안히 하고 사물을 집중해서 관찰하라는 그녀의 말도 허공을 맴돌 뿐이다. 정작 그녀는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이 그녀에게 이토록 결핍을 느끼게 만들었을까?  보영은 자신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에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혼자 사는 이혼녀라는 이유로 친구들이 피하고, 남자들이 쉽게 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우습게 보는게 싫다. 항상 날을 세우고 사람들을 공격하는 이유이다. 보영은 정확히 자신의 삶이 왜 불만으로 가득찼는지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아니, 그 이유를 애써 찾으려 하지 않는다. 보영은 하루하루를 견디듯 살아가고 있지만 실은 매일매일 도망만 다니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양평의 한 기업 연수원에서 만난 소리 강사 정남은 다르다. 나이는 어리지만 이혼은 보영보다 선배인 정남은 그녀가 내뱉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 만큼이나 속을 감추지 않는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살갑게 말을 붙이고, 술이 들어가면 자신의 상처를 흉금없이 털어 놓는다. 그런 정남에서 꼭꼭 싸매고 입을 닫아 벌이는 보영은 영화 속 표현대로 까도까도 속을 알 수 없는 '서울 다마네기'일 뿐이다.

보영과 정남 모두 이혼을 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고,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닮은꼴의 인물이다. 하지만 둘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 정남은 문제를 애써 피하려고 하는 보영에게 답을 찾는 방법을 일러주고 싶어 하지만 보영은 늘 그렇듯 독이 든 표정과 목소리를 거절한다. 계속 도망만 다니면 병이 들고 죽게 된다는 말도, 글로만 다 아는 척 한다는 정남의 말도 보영은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자신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대면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 그리고 불꺼진 방에서 누가 듣지 않도록 눈물을 흘릴 뿐이다.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의 첫 결과물 중 하나인 이숙경 감독의 <어떤 개인 날>은 감히 말할 수 없었던, 알지 못했던 여자들의 속 깊은 이야기들을 스크린에 펼쳐 놓는다. 여성학자로 더 이름이 알려진 감독은 영화 속에서 도도한척, 배운척, 책 속에나 나올 법한 어려운 이야기들로 '폼'을 잡지 않는다. 먹물을 쫙 빨아낸 자리에는 여자이면서 이혼녀로 살아야 하는 인물들과 그들이 견뎌내야 하는 대한민국의 흐린 현실들만이 남아 있다. 감독은 마흔을 넘겨 도전한 첫 영화감독의 데뷔작에서 여성에 대한 좀더 진솔한 소통을 시도하고자 한 것이다.

이혼 1년차인 보영과 2년차의 정남. 혼자 아이를 키우고 생계를 떠맡은 이들은 많은 부분에서 이혼한 여자로서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버거운 현실에 공감을 한다. 주로 정남의 입을 통해 발설되는 그녀들의 이야기는 침묵한 채 살아가는 우리 주변의 누군가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다. 그녀들의 침묵은 어쩌면 힘에 겨워 곪고 아픈 상처를 내뱉었을 때 그것들이 결국엔 그녀들의 몸을 할퀴는 칼날이 되어 돌아오는 이 땅의 현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우리가 모르거나 외면하고 지나쳤을 뿐이다.

그래서 더욱 단단한 보호망으로 자신을 감쌀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 보영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보영과 정남의 만남은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보영의 시선은 항상 자기 내부가 아닌 밖을 향하고 있다. 보영은 자신의 삶에 대한 불만을 항상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쏟아낸다. 자신이 문제가 아니라 주변의 시선과 행동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없이 약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녀는 자기 자신을 보는 눈을 아예 닫아버린 듯 보인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과의 소통 역시 힘들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남은 다르다. 정남의 시선은 항상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래서 정남은 그녀가 겪어야 했던 험난한 '여자의 일생' 속에서도 단단한 자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녀가 뱉어내는 여자로서 성장, 사랑, 결혼, 이혼, 섹스에 대한 거침 없는 말들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보고, 자신에게 질문하고, 답을 찾는 과정에서 치유가 얻어진다는 것을 정남은 알고 있다. 이런 점에서 어찌 보면 정남은 보영보다도 '작가'처럼 보인다.

결국 보영과 정남은 닮은 듯 하면서도 전혀 다른 인물이다. 보영은 정남과 헤어진 이후 어떤 변화를 얻게 될까? 솔직히 <어떤 개인 날>에서 결말로 넘어가는 이음새가 그렇게 깔끔하지는 않다. 자연스런 인과관계보다는 결말로 넘어가기 위해 고리를 짜맞춘 듯한 느낌이 적지 않다. 하긴 삶이 언제나 논리적인 것은 아니니까. 그럼에도 <어떤 개인 날>의 결말에서 볼 수 있는 보영의 따뜻한 모습과 한결 가벼워진 표정은 영화를 마무리로 부족함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 딸아이의 아침을 챙겨주고,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아침 밥상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은 어느 평범한 가정의 엄마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딸을 꼭 껴안으며, 귓속말로 "안전벨트"를 속삭이는 보영의 모습은 적어도 그녀가 "왜 소중한 존재인지"에 대한 이유 중 하나를 찾은 듯 보인다. 더 이상 스스로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는 방법을 말이다. 그리고 보영은 옥상에서 빨래를 넌다. 그녀 위로 이제 거의 개인 하늘이 있다. 어떤 개인 날... 보영의 표정 역시 흐린 겨울 하늘에서 이제 막 개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수컷으로 살아가기에 함부로 그녀들이 주고받은 농밀한 이야기를 모두 가슴으로 껴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시건방은 떨지 않겠다. 내가 영화를 보며서 담아내지 못한 그녀들의 이야기가 훨씬 많이 있을 것이다. 단지 이야기들(Her stories)에 귀를 기울이며 그녀들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가능성을 얻었다는데 만족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를 상처내는 보영의 모습에서 자신을 지키고, 소중히 하는 방법을 하나 배워간다.

결과적으로 한국영화아카데미 제작연구과정의 첫 결과물인 <어떤 개인 날>은 기대 이상이었다. 2009년 베를린영화제 넷패상 수상작이라고 했지만 3000만원이 조금 넘는 제작비로 만든 장편 데뷔작에 그다지 많은 기대를 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단편에서 갓 장편으로 넘어온 초보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안정적인 만듦새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 역시 어색함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너무 힘이 들어가거나, 호흡을 맞추지 못하거나, 이야기가 들쑥날쑥 하거나, 흔한 말로 잰 척하는 등의 장편 데뷔 감독들이 쉽게 범하는 오류들을 밸런스를 맞추며 잘 풀어낸 듯 보인다. 다른 세 작품들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지지부진한 새반찬이 없는 충무로에 KAFA 프로젝트가 분명 새롭고 영양가 있는 반찬이 될 것 같다. 벌써 촬영에 들어갔다는 두 번째 장편들도 기대가 된다.


 

P.S. 1
보영과 정남을 연기한 김보영과 지정남을 빼놓고 갈 수 없을 것 같다. 솔직히 <어떤 개인 날>은 두 배우가 영화의 30분 정도를 책임지는 연수원 숙소 장면 만으로도 충분한 매력을 갖춘 영화다. 한 공간에서 두 배우가 만들어 내는 앙상블은 마치 잘 짜연 연극을 한 편 보는 기분마저 들게 한다. 두 배우가 아니었다면 그녀들이 주고 받은 숱한 이야기들에 생명력이 없었을 것 같다. 주인공 김보영을 처음 기억하게 된 것은 몇 년 전 연극 <상사주>를 통해서였다. 그 이후 몇 편의 영화에서만 간간히 찾을 수 있었는데 <어떤 개인 날>은 그녀의 가능성을 충분히 확인시켜준 작품이 될 것 같다. 광주에서는 이미 스타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는 지정남의 촌철살인의 대사들 역시 영화를 오래 기억시킬 양념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