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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시리어스맨] 너무나도 진지했던 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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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어스맨 (A Serious Man)
코엔 형제 감독, 2009년

가슴 서늘하게 만드는 코엔 형제만의 블랙코미디

“당신의 삶은 안녕하십니까?” 누군가 이렇게 묻는다면, 당신은 뭐라고 답할 것인가. 어떤 이는 해맑은 웃음으로 잘 살고 있다고 답할 것이고, 어떤 이는 풀이 죽은 표정으로 별로 안녕하지 못하다고 힘없이 말할 지도 모른다. 물론, 질문한 이에게 불난 집에 부채질 하는 거냐고 버럭 화부터 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꾸만 삶이 꼬여만 가고 있어 미칠 지경인, 그래서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이 너무나 많은 ‘진지한 남자(a serious man)’ 래리(마이클 스터버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코엔 형제의 신작 <시리어스맨>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지지리도 재수 없는 한 남자가 한 가닥 희망을 붙잡으려고 별짓을 다하는 이야기’다. <아리조나 유괴사건> <파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등 코엔 형제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특별한 상황에 휘말리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주로 그려온 것을 떠올린다면, <시리어스맨>의 주인공 래리 또한 딱 코엔 형제다운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코믹 소동극 <번 애프터 리딩>으로 잠시 쉬어가는 듯 했던 코엔 형제는 자신들의 장기나 다름없는 블랙코미디로 돌아온 <시리어스맨>으로 특유의 짙은 냉소를 마음껏 펼쳐 보이고 있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래리의 삶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터져 나오는 사건들로 난처한 상황에 처하지만, 정작 영화는 래리를 둘러싼 이 모든 사건들을 마치 일상의 한 부분인양 평범하게 묘사한다. 아내는 퇴근한 래리에게 당연하다는 듯 불륜 사실과 이혼을 요구하고, 아이들은 래리를 아빠가 아닌 집안 관리인처럼 생각하는 듯 자연스럽게 그를 무시하고, 도무지 세상과 친해질 생각이 없어 보이는 동생 아더는 래리에게 자꾸만 짐이 될 뿐이며, 이웃집 남자는 래리의 잔디밭을 당당하게 자신의 것이라 우기고, 학점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는 학생은 오히려 뇌물로 래리를 협박하기까지 한다. 그야말로 설상가상이라는 말처럼 래리의 삶은 주위사람들로 인해 순식간에 잠식당하고 만다. 물론 살다보면 안 좋은 일이 겹쳐서 터질 때도 있는 법. 하지만 래리는 어떻게 하면 이 힘겨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해답을 원한다. 이쯤 되면 <시리어스맨>은 마치 베스트셀러에 오른 ‘시크릿’처럼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인생에 대한 명쾌한 조언을 담은 상담서라도 될 것처럼 보인다. 이토록 진지한 래리의 너무나도 절절한 감정에 공감이 간다면, 영화가 그런 래리에게 작은 희망이라도 선사하길 간절히 바라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코엔 형제가 누구인가. 매 작품마다 삶의 부조리함을 기저에 깔아뒀던 코엔 형제의 태도는 <시리어스맨>에서도 변함이 없다. 삶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 위해 래리는 저명하다는 랍비를 찾아가지만, 단 한 명도 그럴싸한 대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젊은 랍비는 래리의 말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주차장을 보라며 말도 안 되는 설교를 늘어놓고, 나이가 지긋한 랍비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게 빤한데도 바쁘다는 핑계로 래리의 고민을 들어줄 생각조차 안 한다. 그나마 래리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는 중년의 랍비는 마치 대단한 교훈이라도 있는 듯 어느 치과 의사가 겪은 미스터리한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정작 그 교훈마저도 래리에게는 어처구니없게 다가올 뿐이다. 뭔가 그럴싸해 보이는 사건도 사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공허한 교훈. 그러나 이것이야 말로 코엔 형제가 <시리어스맨>을 통해 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진실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불확실성 원리’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도 래리는 정작 자신의 삶이야말로 불확실함 그 자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자신을 둘러싼 여러 인물들이 그저 우연처럼 비슷한 시기에 래리에게 무언가를 요구했을 뿐임을 알지 못한 채, 오히려 이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음을 <시리어스맨>은 은근히 비꼰다. 너무나 진지한 래리의 갖가지 말과 행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하며 웃음을 자아내는 <시리어스맨>은 가끔씩 래리와 우리도 다를 게 없음을 상기시키며 웃고 있던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 순간 느낄 수 있는 삶의 부조리함, 그것이 바로 <시리어스맨>에 담긴 핵심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가 낯설거나, 혹은 삶이 부조리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이들에게 <시리어스맨>은 언제 웃고 언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든 영화일지 모른다. 그런 이들을 위해 영화는 초반부에 영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매뉴얼을 친절하게 제시한다.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연민을 가지고 받아들여라.” 어느 랍비의 말을 인용한 이 자막의 방점은 물론 ‘받아들여라’다. 영화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20세기 초 어느 폴란드 유대인의 이야기 또한 앞으로 영화가 이야기할 현실의 부조리함을 받아들이기 위한 일종의 가이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우리의 삶은 언제 희망이 찾아오고 언제 절망이 찾아올지 알 수 없음을 <시리어스맨>은 이야기한다. 설령 언제 그것이 찾아오는지 알 수 있다 한들, 그것을 스스로의 의지로 막을 수는 없음을 말한다. 모든 걸 다 날려버릴 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다가오는 토네이도의 등장으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영화는 그 순간 한없이 나약하게 보이는 인간들의 모습으로 깊은 잔상을 남긴다. 너무 절망적이라고? 중요한 건 <시리어스맨>은 절망을 이야기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다만 래리는 현실은 언제나 희망과 절망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그저 자신의 고민에 너무 진지했던 것뿐이다. 희망과 절망은 결국 주어진 현실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라고 <시리어스맨>은 말한다. 이것이야말로 ‘시크릿’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인생에 대한 조언이 아니겠는가. (★★★☆)

* 조이씨네에 올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