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의 격렬함은 마약과 같아서 종종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중독된다'는 문구로 시작하는 '허트 로커'는 전쟁이란 광기 속에서
심신적으로 붕괴 되어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초반부의 강렬한 폭발씬을 통해 폭탄 처리반의 작업이 목숨을
거는 위험한 직업임을 관객에게 설득력있게 전달한다. 불의의 사고로 폭발물에 직접 접근을 시도하려는 군인의 모습을 슬로우하게 묘사한
장면은 극한적인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초반의 폭발물 사고로 죽은 팀리더의 후임으로 온 제임스 중사는 초반부의 신중한 선임와
대비되는 행동을 보인다. 영화는 제임스의 폭탄 처리 과정을 통해 위험천만한 스릴감을 전달한다. 고요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폭탄
처리의 과정은 조그마한 소리나 예상치 못한 돌발 사건들의 등장을 통해 긴박감을 안겨준다.
정해진 안전수칙을 무시해대며 폭발물을 처리하는 제임스의 행동은 그의 부하인 샌본과 앨드리지를 혼란스럽게 한다. 샌본과
앨드리지가 제임스의 행동에 분노하는 것은 그가 굳이 위험을 감수하면서 폭탄을 처리할 필요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폭탄을 향해
나아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폭발물 신고를 받은 폭탄처리반 일원들은 사람들이 모두 대피하면 안전하게 로봇 원격조종을 통해 다른
방향으로 폭발을 유도하는 식으로 폭발물을 처리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는 샌본의 충고를 무시하고 직접 손으로 폭발물을
해체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제임스의 행동을 지켜본 지휘관은 그의 행동을 치하하지만 30여 일동안 무사히 복무를 마치면
고국으로 돌아갈 두 병사들에게 제임스의 폭탄 처리 방식은 자살같은 행동과 다름없게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를 단순히 폭발물 처리의 스릴감에 빠진 사이코 변태로 묘사하기 보다는 그 역시 보통 병사처럼 전쟁 속에서
심적인 아픔을 겪는 인간적인 면이 있음을 여러 에피소드들을 통해 보여준다. 예를 들어 DVD를 팔던 베컴이란 소년이 인간 폭탄의
형태로 죽어있는 것을 목격한 뒤 맞폭탄으로 폭탄을 처리하지 않고 폭탄을 직접 꺼내는 위험을 감수하고 소년의 시체를 보호하려는
제임스의 모습은 그가 생명경시적인 전쟁광이 아니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베컴을 죽게 한 폭탄 테러범을 찾기 위해 제임스는
군대를 탈영해 민간인 지역을 수색하기도 하고 야간에 일어난 폭탄 테러가 원격 조종이란 점을 알아낸 뒤 위험을 무릅쓰고 그들을
추격한다. 하지만 제임스의 부하인 샌본과 앨드리지는 그런 제임스의 모습을 만용에 빠진 인간으로 느낄 뿐이다. 임무가 끝난 뒤
샤워장에서 물을 받아들이는 제임스의 모습을 보면 인간적인 연민이 느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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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는 샌본과 앨드리지를 통해 전쟁 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병사의 인간적인 면을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예를 들어 초반부
장면에서 자신의 우유부단함을 자책하는 엘드리지가 또 다시 폭발물로 인해 자신을 돌봐주던 군의관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는 과정은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다. 비교적 침착한 태도로 서로 상극인 제임스와 앨드리지를 조절하던 샌본 역시 계속되는 죽음의 공포에 무너져
간다. 죽음이 벌어지는 전쟁의 풍경 속에서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두 병사의 모습은 인간적인 연민을 불러 일으키면서 동시에
그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아드레날린을 분출하는 제임스의 비이성적인 광기를 대조적으로 드러낸다.
'허트 로커'의 가장 인상적인 면은 바로 마지막 장면이다. 보통 참혹한 전쟁에서 돌아온 남성 병사들이 여성을 만남으로써
정신적인 상처를 위로받는 기존의 전쟁 영화들과 달리 '허트 로커'의 마지막 장면은 그 틀을 완전히 깨트린다. 군 복무를 마치고
가정으로 돌아온 제임스는 아내와 함께 쇼핑을 보지만 이 평화로운 광경은 그에게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시리얼을 고르지 못해
방황하는 모습 그리고 집안 일을 하면서도 이라크 전쟁의 참상을 들먹이며 그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읊조리는 제임스의 모습은 전쟁의
광기 속에서 회복하지 못한 병사의 모습처럼 느껴진다. 결국 제임스는 다시 군인을 자원해 죽음의 공기가 흐르는 전장으로
되돌아간다. 군복을 입은 제임스가 다시 방탄복을 입은 상태로 웃음짓는 마지막 장면 그리고 리카운트된 그의 남은 군 복무 일수를
표시한 자막은 '이런 꼴통같은 놈'이란 욕설이 절로 나오게 만드면서도 그 현장 속에 돌아가야 자신의 존재가치를 느끼는 제임스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한편으론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허트로커'는 이라크 전쟁에 대한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묻는 '그린 존'처럼 어느 특정한 정치적 입장에서 이라크 전쟁을
바라보지 않는다. 하지만 '엘라의 계곡'의 시나리오를 쓴 마크 보얼의 영향인지 몰라도 '허트 로커'는 전쟁 속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심적인 고통을 겪는 병사들의 애환을 인상적으로 묘사한다. 전쟁 속에서 방황하는 병사들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렸다는 점
그리고 그 전쟁에서 허우적거린 나머지 그 광기에 중독되어 버린 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전쟁이란 것이 얼마나 비이성적인 광기와
정신적인 아픔을 주는지 드러냈다는 점에서 '허트 로커'는 찬사받아야 할 영화가 아닐까 생각한다.
ps1. 전쟁 중독으로 다시 전장으로 되돌아가는 제임스의 모습은 일본 애니메이션 '에이리어 88'을 연상시킨다. 다만
'에어리어 88'에서 연인에게 되돌아가는 길 대신 전장으로 뛰어드는 길을 선택한 카자마 신의 모습에서 남자들의 우정이 느껴지는
면도 없지 않는데 반해, '허트 로커'에서 전장으로 되돌아온 제임스의 마지막 모습은 전쟁의 광기에 빠져든 인간의 어리석음이
느껴진다.
ps2. 영화 속에서 카메오로 등장하는 몇몇 배우들의 모습이 반갑게 느껴지는데, 그들이 등장하는 장면들이 유독 '허트 로커'에서
인상적인 부분 중 하나였던 것 같다. 예를 들면 가이 피어스가 등장하는 초반부에서 보여지는 폭발씬이 정말 인상적이었으며, 랄프
파인즈가 등장하는 사막 전투씬은 고요하면서도 광활한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저격전이어서 유독 기억이 남는다. 특히 현상금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적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포로들을 쫓아가는 랄프 파인즈의 모습은 비이성적인 광기를 잘 드러내는 연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 밖에도 미드 덱스터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 크리스천 카마고가 군의관으로 등장하는 폭발씬도 엄청난 충격이어서 기억이
남는다.
ps3. '허트 로커'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배경음악을 유튜브에서 찾아봤더니, 인더스트리얼 메탈 밴드인
미니스트리(Ministry)의 'Khyber Pass (카이버 고개)'라는 곡이라고 한다. 이국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 여성 보컬의
바이브레이션과 날카로운 기타 연주가 인상적인 곡인데, 3분 이후부터 영화에 사용된 부분이 등장하면서 곡의 유일한 가사가 들리는
점이 특징이다. 짧은 가사이지만 이라크 전쟁의 목적 중 하나였던 빈 라덴이 어디 있는가 물으며 부시를 조롱하는 점이 눈길을 끈다.
Where's Bin Laden
Where's Bin Laden
빈 라덴은 어디 있는거지 X 2
He's probably runnin'
Probably hidin'
그는 아마 도망가고 있을거야
아마도 숨고 있을거야
Some say he's livin' at the Khyber Pass
Others say he's at the Bush's ranch
누군가 말하길, 그는 카이버 고개에 살고 있다고 하네
다른이가 말하길, 그는 부시의 농장에 있다고 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