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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커트 보네거트, <갈라파고스>

커트 보네거트의 소설 '갈라파고스'는 다윈의 자연 선택의 법칙과 노아의 방주라는 기독교적인 설정을 흥미로운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작가는 인류가 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멸종하고 유람선에 탑승한 승객들 중 생존한 일부 사람들의 후손들이 백만 년동안 갈라파고스의 한 섬에서 살아가며, 진화의 법칙에 의해 현재의 인간과 다른 형태의 모습으로 변화되었다고 설정한다. 마치 성경에 등장하는 노아의 방주처럼 인류가 멸망하고 일부 살아남은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인류가 탄생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소설은 그리 간단하게 서술된 글이 아니다.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인류가 어떤 위험에 처했으며 살아남은 일부 사람들이 어떻게 생존하게 되었는지 서술하기 보다는 인류를 백만 년동안 지켜본 한 화자를 등장시켜 현재와 과거의 인류를 비교하기도 하며 처음부터 탑승자 중 누가 죽는지 발설한 다음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었는지 후반부에 드러내는 등 제법 복잡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결국 책을 읽는 독자는 퍼즐처럼 섞인 이야기를 하나씩 조합시켜서 이야기를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시제가 복잡하고 뒤죽박죽인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은 굉장히 흥미로운 블랙 코미디 같은 느낌이 든다. 왜냐하면 현재의 인류의 모습과 백만 년전의 인류의 모습을 비교한 문구들을 통해 당시 큰 뇌를 가진 인간들이 그 뇌 덕분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풍자함으로써 자본주의와 산업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섬에 사는 현재의 인간들은 단지 물고기를 잡기 위해 어류에 가까운 형태로 진화됨으로써 더 이상 큰 뇌를 가지지 않고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되지만 그 덕분에 백만 년전의 인간들처럼 큰 뇌로 인한 고통을 겪지 않는다. 단지 커다란 뇌를 사용하여 경제에 관한 견해를 바꾸었을 뿐인데 미국과 일본의 화폐를 제외한 세계의 화폐가 휴지조각이 되어버리고 그 결과 소설의 배경이 되는 에콰도르를 비롯한 중남미 국가의 국민들은 굶주림과 가난으로 고통받게 된다는 설정은 지금의 현실과 다를 바 없다. 인간이 해야 할 일을 기계들에게 모두 넘겨버렸으니 그야말로 큰 뇌가 쓸모없다는 증거 아닌가라고 말하는 작가의 풍자는 자본주의로 인해 일부 사람들만이 거대한 부를 축적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는 아이러니한 현실을 조롱하는 듯 싶다.

인류가 위기에 처하게 된 그 순간에서도 자본주의로 인한 극단적인 빈부 격차는 항구 근처의 호텔을 둘러싸고 존재한다. 호텔 엘도라도 근처에서 유명 인사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길은 식량을 향해 있지만 호텔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들의 고민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천재 개발자인 히로구치가 개발한 만다락스란 동시 통역기를 통해 한몫을 챙기려는 매킨토시란 투자자의 탐욕스런 행동은 순수한 열망으로 그들을 바라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힌다. 결국 우연한 요소들이 하나씩 발생하면서 호텔 엘도라도를 둘러싼 사람들은 굶주림을 이기지 못해 호텔을 약탈하게 되며, 극단적인 경제 위기를 견디지 못한 이웃 국가에서 전쟁을 선포함으로써 조용한 항구였던 과야킬은 끔찍한 지옥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극단적인 위기 속에서 유람선을 타기 위해 대기중이었던 일부 승객들은 배를 타고 정처없는 항해 끝에 인류가 새롭게 머물게 될 섬에 도착한다. 이처럼 소설은 어두운 이야기이지만 작가는 풍자적인 필체로 소설 속의 일부 인물들의 탈출 과정을 묘사한다. 예를 들어 유람선의 일행이 탈출을 하는 과정에서 초반부에서 (이름 앞에 별표를 찍어놓아) 죽음이 예정되어 있던 인물들이 느닷없이 숨겨진 병이 도발해서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는 과정이라든지 만다락스라는 만능 번역기가 정작 그들의 탈출 과정에서 아무 기능도 발휘하지 못하는 모습을 통해 기계에 의존하는 인간들의 희망을 조롱한다. 일행의 행동을 분석하던 만다락스가 내보내는 명언들을 통해 인물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는 작가의 솜씨가 인상적이다.

한편 작가는 아무런 죄책감없이 폭격을 실행하는 폭격수의 행동을 통해 전쟁의 비정함을 드러내기도 한다. 에콰도르의 한 병원을 향해 폭격을 실행하는 조종사의 행동을 마치 레이더와 미사일의 교미 행위처럼 묘사한 장면이 눈길을 끄는데, 폭격을 통해 적군의 시설을 파괴했다는 쾌감을 얻는 전쟁광들의 모습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뉘른베르크에서 폭격으로 인해 파괴된 현장을 직접 목격한 작가의 입장에선 폭격을 통해 상대방을 말살하려는 군인의 행태를 비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소설 속의 화자인 레온 역시 전쟁으로 인해 삶이 파괴된 남자이다. 베트남 전에서 끔찍한 전쟁의 여파를 경험하고 자신의 동료를 죽인 노파를 직접 살해한 끔찍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탈영이란 극단적 선택을 하게 만들었다. 작가는 유령처럼 떠돌아 이야기를 서술하는 레온의 과거를 통해 전쟁으로 피폐화된 군인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갈라파고스'는 인류의 진화 과정을 통해 그들의 어리석음을 풍자하고 조롱하지만 바꿀 수 없는 운명에 체념하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제 5살장'에 비해선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면도 보인다. 소설의 화자인 레온은 유령이 되어 떠돌면서 인류의 변화를 백만 년동안 지켜본다. 호기심에서 시작한 오랜 세월이 걸린 관찰 후 그는 '자연 선택의 법칙'에 의해 변화된 인류는 과거의 인류와 달리 더 이상 현실적인 고민 없이 자연 속에서 어우러진 존재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인류는 큰 뇌를 버림으로써 그들이 만들어낸 제도나 기계로 인해 고통받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뭐래 해도, 나는 믿어. 사람들 속마음은 사실 착한 거라고.'라고 말한 안네 프랑크의 말처럼 커트 보네거트는 인류는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이므로 어리석은 자본주의적인 가치나 전쟁이라는 비정함을 버리고 올바른 방향으로 진화한다면 보다 나은 존재로 변화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이제 배우게 될겁니다.'라고 말하는 책의 마지막 대사처럼 인류도 과거의 비극으로부터 뭔가를 배울 수 있다면 이 세상은 조금이나마 달라질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