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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커트 보네거트, <제 5 도살장>

커트 보네거트의 '제 5도살장'은 2차 세계대전을 다룬 소설이지만 전쟁의 비극을 독특한 관점에서 바라본 점이 특징이다. 2차 대전을 다룬 서적이나 영화들이 대부분 전쟁에 참전한 병사들의 모습을 용맹하게 묘사함으로써 파시즘을 물리친 군인들의 용맹을 기리거나 홀로코스트같은 대량학살범죄를 통해 나치의 비인륜적인 범죄를 고발한다.

하지만 '제 5도살장'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특성에서 벗어난 점이 특징인 소설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인 빌리 필그램은 너무나 나약한 기질을 보여주는 병사이다. 종전 직후까지 독일군에게 전쟁포로로 붙잡혀 드레스덴 근처의 수용소에 갇혀 지낸 저자의 개인적 체험으로 구성된 빌리의 수용소 생활은 성전이란 명분에 속아 외국에서 비참하게 죽어가던 어린 십자군 아이들의 모습과 유사한 느낌이 든다.

한편 '제 5도살장'에서 비판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나치의 범죄가 아닌 연합군의 폭격으로 인해 13만여 명의 인명을 앗아간 드레스덴 공습이다. 커트 보네거트는 수용소의 포로에게 행해지는 어이없는 죽음 등을 통해 나치의 범죄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그가 중점적으로 묘사하는 전쟁의 비극은 드레스덴에서 행해진 공습의 현장이다. 공습으로 인해 수많은 독일인들이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고 고풍있던 도시가 마치 달의 분화구처럼 변해버린 현장을 묘사함으로써 연합군의 공습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드러낸다.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빌리 필그램이란 인물을 창조한 뒤 독특한 SF적 설정을 활용한다. '들어보라. 빌리 필그램은 시간에서 해방되었다.'라는 서문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빌리 필그램이 자신은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진행된다. 이후 소설은 세 가지 차원을 넘나드는 빌리 필그램의 행적을 묘사한다. 비행기 사고에서 살아남은 뒤 자신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는 노년의 빌리 필그램, 실제로 외계인들의 비행선에 납치된 후 몬테나 와일드핵이란 여배우와 함께 트랄파마도어 행성에 머물게 된 빌리 필그램 그리고 2차 대전에서 독일군에게 포로로 붙잡혀 드레스덴 수용소에 수감되어 생활하게 된 20대의 빌리 필그램의 경험이 동시에 진행된다. 예를 들면 전쟁 포로로 붙잡힌 빌리가 소독을 위해 샤워를 하는 과정 이후 외계인들의 우주선에서 소독을 하는 과정으로 이동하며, 정신 분열의 계기가 된 60년대의 비행기 사고 직후 빌리는 병원에 입원한 후 포로 수용소의 침대에 누워있는 젊은 시절로 차원 이동한다.

이처럼 '제 5도살장'은 뒤죽박죽인 시간대와 공간대를 이동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지만, 시간 여행을 다룬 소설 속의 인물들이 미래를 알고 난 후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반해 소설 속의 주인공인 빌리 필그램은 여러 차원을 이동하면서 앞으로의 벌어질 일을 알게 되면서도 그 현실을 변화시키려고 시도하지 않은 체 자신에게 벌어지는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인다. 그가 현실을 바꾸려고 하지 않은 이유는 앞으로 벌어질 전쟁의 비극은 그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운명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트랄파마도어 행성의 외계인에게 납치된 빌리는 드레스덴 공습을 언급하며 인류가 어떻게 하면 전쟁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지 묻는다. 하지만 외계인들은 거대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신들도 어리석은 전쟁을 통해 멸망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 현실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 벌어질 끔찍한 미래를 생각하지 말고 현실의 순간들만을 보며 즐겨 지내라고 설득한다. 외계인조차 변화시킬 수 없는 운명적인 미래에 압도된 빌리는 자신의 젊은 시절 일어난 비극의 순간이 다가올 때까지 그 흐름을 쓸쓸히 받아들인다. 인간의 죽음을 서술할 때마다 '그렇게 가는 거지'라고 말하는 작가의 독백은 어찌할 수 없는 비극에 대한 허무함과 무력감이 잘 드러난다.

빌리의 시간 여행을 통해 드러나는 '제 5도살장'의 이야기는 인간 문명에 대한 어두운 비관과 운명론에 관한 글이다. 하지만 커트 보네거트는 성경 속의 롯의 아내를 언급하며 뒤를 돌아본 그녀의 모습이 인간적이라고 평한다. 적군에게 유황불을 쏟아낸 그 현장을 뒤돌아보는 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것을 돌아보는 것이 인간적인 행동임을 말하고자 하는게 아닐까. 비록 체념과 쓸쓸함이 담긴 소설이지만 초반부에 드러난 작가의 생각은 전쟁의 비극이 다시 없길 바라는 그의 진심어린 마음이 담겨 있다. 전쟁에 대해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비록 새들의 지저귀는 '짹짹' 소리만큼 미약할지 모르지만, 앞을 내다보며 나아가면서 뒤에 있었던 과거의 비극을 잊으려 하는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학살에 가담해서는 안되고 적이 대량학살 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된다고 늘 가르친다.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 (p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