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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미장센이 되어버린 그녀들의 절망(크랙,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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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저 위험한 바깥 세상을 모르는 어린 학생들을 도발하고 매혹시키는,
용감하고 자유롭고 아름다워 보이지만
실은 거짓말쟁이에 나약하고 비겁한 G교사를 연기한
에바 그린은 완벽했다.
아니 이 역할이야말로 에바 그린 그 자체였다.
<몽상가들>과 <007 카지노 로얄>에서
남자 주인공들을 사로잡아 파국으로 몰고 가는 팜므 파탈을 완벽하게 연기하기에
그녀는 어딘가 온실 안의 화초처럼 서툴고 연약했다.

1930년대 외딴 섬에 자리 잡은 여자 기숙학교에서 일어나는
여교사와 여학생들 사이의 비밀스러운 애정 문제를 다룬 <크랙>은
저 유명한 스콧 형제를 아버지와 삼촌으로 둔
또 그 두 사람이 이 영화의 제작에 참여하기도 한
조던 스콧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수식어만큼이나 탄탄하고 섬세하고 매력적이지만
그 화려한 배경을 뛰어넘지는 못한다.

여성이 직업을 가지고 사회생활을 하는 일이 당연해진 것은
돌이켜 보면 인류의 역사에서 정말로 얼마 되지 않은 사건이다.
20세기 초에 교육받고 능력 있는 엘리트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여학교나 가정의 교사밖에 없었다.
이 같은 사회적 한계에 필연적으로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여성들의 고뇌와 절망,
가부장제 또는 한 시대라는 거대한 문제를 <크랙>은 전혀 담아내지 못한다.
G교사의 과거가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듯 어물쩍 넘어가듯 말이다.

물론 영화의 결말에서 껍질을 깨고 용감하게 신세계로 모험을 떠나는 다이처럼
기존 체제에 저항한 여성들이 이루어낸 훌륭한 업적과
화가나 작가 같은 예술가로서 남겨놓은 뛰어난 작품은 존재하며
그 의의를 부정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나는 버지니아 울프, 시몬 드 보부아르, 프리다 칼로 같은 이들의
직설적인 비명과 외침에 그다지 열광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시대와 개인이란 문제의 복잡 미묘함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가문과 재산에다 능력까지, 그야말로 은수저를 손에 쥐고 태어난 사람들이
자신이 서 있는 발판까지 뒤집기란 정말로 어렵다.
게다가 여성 작가들은 오랫동안 자신의 불행을 팔 수밖에 없었다.
세상은 그 히스테릭한 목소리에만 귀 기울여왔는데
왜냐하면 저항을 체제로 포섭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크랙>이 시대의 절망을
매력적인 여교사와 아름다운 소녀들의 연애 놀이 같은 불장난
혹은 사춘기 성장통으로 잠재워버리듯 말이다.
그래서 역사의 주역 뒤의 '배경'에 불과한 나는
이 재발견되지 않은 풍경에
아니, 
간신히 모습을 드러낸 고통을 분위기로 전락시키는
이 영화에 결코 만족할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