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da/USA;2007;85min;35mm;color
Director: Stuart Gordon
Cast: Mena Suvari, Stephen Rea
Director: Stuart Gordon
Cast: Mena Suvari, Stephen Rea
부천국제영화제가 막을 내렸다. 2005년 영화제 집행위와 부천시의 갈등 이후 맥을 못 잡던 영화제는 올해도 그저그런 행사로 기억될 듯하다. 게다가 기간 내내 태풍 갈매기가 쏟아낸 비 때문에 상영관이 아니면 영화제라는 분위기를 어디서도 느끼기 힘들었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작품을 들고 먼길 마다않고 참석한 게스트들에게 까지 민망하게 기억되지 않을까 걱정이다. 좋은 영화들이 더 빛을 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할 영화제의 미숙한 운영이 답답할 뿐이다. 부산은 그렇다치고 서울에 근접한 지리적 이점과 보다 대중적인 영화를 상영한다는 컨텐츠적 이점을 갖고서도 전주국제영화제보다 관객이 적은 점은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이번 영화제에 '좋은' 영화들이 관객들을 찾았다. 개막작 <바시르와 왈츠를>부터 시작해 각 섹션별로 '판타스틱'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영화들이 쏟아졌다. 놓친 영화들이 있어 아쉽긴 하지만 9편을 봤으니 배가 고픈 정도는 아니다. 개인적으로 9편 중 최고는 B급 영화의 마스터피스라 할 수 있는 스튜어트 고든의 2007년작 <스턱 stuck>이었다. 바시르와 왈츠를, 시암의 사랑, 어둠 속의 공포, 단편 소프트 까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작품들이 많았지만 판타스틱 영화제의 이름이 어울리는 영화는 아무래도 <스턱>의 자리가 아닐까 한다.

미국과 캐나다의 합작인 <스턱>은 스튜어트 고든이라는 감독의 이름답게 B급 공포 영화의 재미를 한껏 누릴 수 있는 작품이다. 살이 터지고 피가 넘치고 뼈가 부러지는 잔인한 장면들은 그런대로 눈뜨고 볼 수 있을 정도로 'excuse'됐고(오히려 이 영화의 가장 '헉'소리 나오는 장면은 오프닝 시퀀스의 '똥'이다.) 반면에 유머와 위트는 적재적소에서 분위기를 붇돋고 있다. 여기에 날카로운 사회 풍자는 씁쓸하면서도 통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실화에 살을 붙인 이야기는 전보다 더 풍성해졌고, 배우들의 호연이 맞물리면서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빠질 수 없는 영화로 기억될 듯 하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지금 미국이 처한 상황 자체를 공포 영화의 배경으로 끌어오고 있는 점이다. 약에 취한 브랜디(미나 수바리)의 차에 치인 톰(스티븐 레아)이 탈출하는 과정을 주된 내러티브로 사용하고 있지만 이야기를 더욱 흥미롭고 괴기스럽게 만드는 것이 각각의 배우들이 처한 상황이다. 미국 중산층의 몰락, 편협한 인종주의가 상징하는 폭력과 공포, 두려움이 이야기 전반에 강한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고 있는 것이다.
브랜디는 침대시트에 똥을 싼 할아버지의 엉덩이를 아무렇지 않게 닦을 만큼 환자들과 동료들에게 인정받는 노인요양원의 간호조무사다. 상사는 그런 그녀에게 팀장직을 제안한다. 단, 토요일 근무에 나와 달라는 것. 상사의 협박 아닌 협박을 받아들이고 그녀는 업무에 대한 스트레스를 오로지 '약'에 의존한다. 클럽에서 실컷 약에 취한 그녀는 토요일 근무를 위해 집에 돌아오는 중 톰을 친다. 그녀의 자동차 앞유리에 낀(stuck) 톰. 하지만 브랜디는 그를 걸치고 달릴 수밖에 없다. 교통사고를 내고 일에 나가지 못하면 팀장 자리는 물 건넌 나룻배일 뿐이다. 그녀에게 톰은 승진을 위협하고, 아직 할부도 끝나지 않은 자동차를 박살낸 방해물같은 존재다. 승진도 하고, 차도 고치고, 다시 안락한 삶은 살기 위해 브랜디는 톰이 죽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톰은 세들어 사는 아파트 생활비를 내지 못해 물건 다 뺏기게 생긴 실직자다. 집주인은 인터뷰에 가기 위해 양복 한벌 빼달라는 사정도 듣지 않는다. 우여곡절 끝에 직업소개소에 도착하지만 안하무인에 도통한 직원들은 자신들의 실수로 누락한 서류 때문에 톰을 돌려보낸다. 그의 경력조차도 무의미하다. 갈 곳 없는 톰은 공원 한 켠에 자리를 잡지만 경찰은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는다. 맘씨좋은 노숙자에게 선물로 받은 카트를 이끌로 밤거리를 헤메는 톰은 결국 비틀거리는 브랜디의 자동차와 충돌한다. 그리고 그녀의 차고에서 앞유리에 몸을 낀 채 살기 위한 사투를 벌여야 했다. 애원하고, 읍소하고, 매달렸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결국 톰은 살기 위해 브랜디와 그녀의 애인 라시드를 죽여야 했다.

의료보험제도와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연신 신문과 TV에 오르내리면서 그 동안 미국에 가지고 있던 환상이 국내에서도 천천히 무너지고 있다. 아메리카 드림의 실체가 보이면서 미국은 돈 없으면 아프면 안 되고, 우리만큼 집 한 채 장만하기 힘든 곳이라는 사실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중심에는 중산층의 몰락이 있다. 톰은 다시 원래 위치로 돌아갈 수 없는 미국 중산층의 현실을 환유하고 있다. 그의 상황이 공포스러운 이유는 누구나 그처럼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브랜디는 아슬아슬하게 생활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녀가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단지 '약' 뿐이다. 요양원에서 천사와 같은 모습과 달리 브랜디의 폭력성은 결국 어뚱하게도 톰에게 튀고 만다. (이 폭력성은 라시드가 바람피는 장면을 목도한 순간 가장 강력하고 효율적으로 폭발한다.) 그녀의 내재된 폭력성과 약에 대한 의존은 중산층의 성격과 다르지 않다.
떨어지면 올라올 수 없고, 자리를 지켜도 아슬아슬한 미국인들이 처한 지금은 모습은 감독의 냉소적인 시선읕 통해 영화 속에서 재연된다.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도 결국 인생의 마지막은 영화의 첫 장면 똥 싼 노인네와 다르지 않다고 놀리는 듯 하다. 그리고 감독은 이와 더불어 어쩔 수 없는 도덕의 '붕괴' 역시 꼬집는다. 브랜디는 범죄를 짓는 줄 알면서도 톰이 죽도록 방관하고, 수세에 몰리자 남자친구를 시켜 톰을 죽이도록 사주한다. 요양원에서 찬사같은 브랜디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상황에 따라 천사와 악마의 양면성을 가진 브랜디의 모습 역시 미국인들의 이중적인 도덕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 몰인정한 톰의 집주인, 동료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브랜드의 직장상사, 배려를 모르는 직업소개소의 직원들, 일에만 충실한 경찰들까지 기본적인 인간에 대한 애정이 식어버린 미국인의 모습이다. 이 영화에서 아직 인간애가 살아 있는 사람들은 단지 톰에게 술 한 잔과 카트를 선물로 건넨 노숙자와 톰을 구출하기 위해 애쓴 옆집 히스패닉 불법체류자 가족, 즉 주변부에 있는 이들 뿐이다. 감독은 이들에게서 미국이 가질 수 있는 희망을 엿보는 듯 하다. 현실에서는 어떨지 모르지만...
공포 영화라는 친구의 말에 귀신이 달라붙은(stuck) 이야기인 줄 알고 있었지만 영화는 미국이라는 환상이 가지고 있는 추악한 이면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오랜만에 만나는 통쾌한 B급 영화였다. 아메리칸 뷰티의 미나 수바리와 라잉 케임의 스티븐 레아의 눈에서 다르지만 같게 느껴지는 두려움이 영화가 끝난 후 지금까지 잔상으로 남는다. 왠지 텔레비전 속의 미국인의 눈동자 역시 다르지 않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