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화 @ theater

[CinDi 2008] 두 편의 단편영화와 함께 만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네마디지털서울 2008(이하 CinDi 2008) 기자회견에서 날 가장 흥분시켰던 것은 바로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내한소식이었다. 때마침 개봉한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으로 한참 그의 영화에 빠져있을 때였다. 무엇보다도 그가 디지털로 작업한 두 편의 단편영화를 만날 수 있다는 소식이 나를 너무나도 설레게 만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아 장커, 장률 감독보다도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이 더 만나고 싶었다.

압구정 CGV는 예상한대로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은 사람이 모였는데도 거기엔 분명 영화제 분위기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주변을 스쳐지나가는 영화인들. 압구정 길거리에서 지아 장커 감독과 장률 감독을 동시에 마주치는 건 정말 색다른 경험이다. 어쩐지 영화와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압구정이, 잠깐이나마 영화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기적의 메데아>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작품을 보기 전에 먼저 두 편의 영화를 봤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페드로 코스타, 샹탈 액커만 등 6명의 감독들이 만든 옴니버스영화 <삶의 조건>, 그리고 그리스 신화의 메데아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기적의 메데아>였다. 두 영화 모두 힘들었다. <삶의 조건>에서는 무려 10분 넘게 계속되는 롱 테이크에 쓰러져버렸고, <기적의 메데아>에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내러티브에 결국 꿈나라로 가고 말았다. 잠을 깨려고 마신 커피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좋게 말하자면 새로운 경험. 중요한 것은 이런 ‘영화’도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다행히도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작품들은 전혀 실망스럽지 않았다. 장편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었던, 단편영화만의 독특한 매력을 느낄 수 있었기에 너무나도 즐거웠다. 다른 경로로는 절대 접할 수 없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를 봤다는 사실, 그 사실만으로도 마치 내가 그의 대단한 팬이 된 것 같았다. 다시 말해 ‘당신들은 못 본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를 나는 봤습니다’라는 어쭙잖은 잘난 척이랄까? 건방져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왠지 오늘 함께 그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그렇게 잘난 척을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싶어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참 작은 세계>

처음 상영된 작품은 2008년에 만든 <참 작은 세계>였다. 이 영화는 일본의 록밴드 더 피즈(Theピーズ)의 노래 ‘실험4호(実験4号)’를 모티프로 하여, 소설가 이사카 코타로(‘칠드런’ ‘중력 삐에로’를 썼고 곧 개봉예정인 <집오리와 들오리의 코인로커>의 원작자이다)와 함께  소설과 영화를 함께 제작하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지구의 온난화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성으로 이주하게 되는 먼 미래를 배경으로 지구에 남아 있는 학교를 다니고 있는 세 소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어린 소년들의 꾸미지 않은 연기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의 소녀들만큼이나 귀여웠고, 풍경들을 통해 소소한 감정을 잡아내는 감독의 연출력도 변함없었다. 귀여우면서도 한 편에 슬픔이 묻어있는 영화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사카 코타로와 야마시타 노부히로가 공동으로 작업한 '実験4号―後藤を待ちながら' 표지

영화가 끝난 뒤 CinDi 2008의 집행위원장인 정성일 평론가 선생님께서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모든 작품세계가 집약되어 있는 영화”라고 평했는데 충분히 공감했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은 “이 영화는 소설과 함께 만들어졌기에 영화만 보는 것은 이야기의 절반만을 보는 것뿐”이라고 말했는데, 그래서인지 소설이 왠지 궁금해졌다. 인터넷을 검색해봤더니 올해 봄에 이사타 코타로의 소설과 영화 DVD가 함께 나왔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소설도 함께 보고 싶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파리, 텍사스, 모리구치>

<참 작은 세계>가 그의 작품세계를 고스란히 보여줬다면, 두 번째로 상영된 <파리, 텍사스, 모리구치>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특유의 재능을 그대로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영화는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이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삭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부터 시작된다. 2003년 TV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게 된 <요짱>이라는 작품이었다.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에게 그 작품은 다시 생각해볼 여지도 없는 실패작이었다. 남들이 자신의 실패작을 알기 전에 그 작품을 지워버리고 싶은 그는, 그때 같이 작업을 했던 스탭들과 함께 그 영화가 유일하게 남아있는 모리구치 시(市)로 떠난다. <요짱>은 일종의 ‘커뮤니티 영화’였다. 모든 촬영은 모리구치 시에서 이뤄졌으며, 배우들 역시 그곳에서 캐스팅됐다. 자신의 마을에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사실에 들뜬 모리구치 시민들은 너나나나 할 것 없이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작업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러나 다시 만난 모리구치 시민들은 감독에게 그때 그 영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며 잊고 있던 감독의 상처를 자꾸만 떠올리게 했다. 마침내 다시 본 <요짱>은 변함없는 실패작이었다. 자신의 실패작을 바라보는 감독의 얼굴은, 마치 평생 지우고 싶은 어떤 기억을 마주한 사람의 그것과 똑같았다.

그럼에도 <파리, 텍사스, 모리구치>는 그의 영화들 중 가장 유머러스한 작품이다. 감독 스스로도 자신에게 쓰라린 기억을 더 슬프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며 그러한 점을 인정했다. 그리고는 “오히려 <요짱> 같은 작품이 있었기 때문에, <참 작은 세계>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라며 자신의 실패작을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토록 웃음 넘치는 영화가 순간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는 한 사람의 진솔한 모습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출처: 인터넷;)

코밑부터 턱까지 덥수룩한 수염을 하고는 어정쩡하게 서있던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모습은 어쩐지 귀여워보였다. 1976년생, 이제 곧 32세가 되는 그가 기대되는 것은 아직 젊은 나이인데도 정말 훌륭한 영화들을 여러 편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장편영화만이 아니라 틈틈이 단편영화과 TV 작품도 병행하고 있는 그이기에, CinDi 2008을 통해 만난 <참 작은 세계>와 <파리, 텍사스, 모리구치>는 그의 작품세계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기회였다. 먼저 본 두 편의 영화 때문에 무척 피곤한 하루였지만,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 덕분에 피곤함도 잊은 채 밤늦게 지하철을 타고 돌아올 수 있었다. 오늘 밤 꿈에는 <참 작은 세계>의 그 귀여운 꼬마 녀석들이 나오지 않을까, 살짝 기대해본다.

* 관객과의 대화 도중 정성일 선생님께서 여담으로 자신은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은 동의할 수 없다면서 <마츠가네 난사사건>이야말로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진정한 걸작이라는 얘기를 잠깐 하셨다. 어떤 점에서 그렇게 생각하신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도 <마츠가네 난사사건>을 좀 더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어쩐지 그 얘기가 반가웠다. 그의 전작을 감상할 수 있는 날이 빠른 시일 내에 마련되었으면 하는 건 지나친 기대일까? <린다 린다 린다> 이전의 작품들이 너무나 궁금할 따름이다.

* 카메라를 집에 놔두고 가서 현장의 분위기를 사진에 담지 못했습니다-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