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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거장전


지난 일요일, 덕수궁 미술관의 "20세기 라틴 아메리카 거장전" 전시에 다녀왔다. 근,현대 라틴 아메리카 미술의 진수를 소개하는 이 전시는 16개국 84명 작가의 작품 120여 점이 전시되는 광범위한 컬렉션이 특징이다. 그러니까 개별 작가에 대한 다양한 작품보다는 라틴 아메리카 미술의 전반적인 흐름과 인상을 살펴볼 수 있는 보기 드문 기회인 듯 하다. 사실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콜롬비아의 페르난도 보테로 정도 이외에는 화가들의 이름도 낯선 편이었는데, 이번 기회에 많은 작가들을 접할 수 있었던 점이 가장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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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색감과 벽화주의로 대표되는 민중적 성향의 그림들, 그리고 구성주의와 옵아트 시기 (2차대전 이후 급속한 경제 호황 속에서 나타난 기하 추상, 비정형 회화들 포함) 작품들까지 매우 다양한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은 작품들은 정치적 메시지가 들어있는 강렬한 작품들과 초현실주의 성향이 반영된 몇몇 작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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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토르 폴레오의 <쇠락> - 잔인하게 막대기에 꽂혀서 지탱되고 있는 이 텅빈 두상은 인간의 피부인 듯한 조각들과 깨진 헬멧, 하얀 가면으로 이어붙인 비참한 모습이다. 게다가 배경은 공동 묘지이며, 눈 속에는 지폐가 들어있다. 2차대전의 충격과 절망을 표현한 작품이라고 하지만, 이 섬뜩한 형체는 텅 비어버린 머리와 하얀 얼굴로 인해,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백인의 가면을 강요당한 (혼혈의 후손들) 라틴 아메리카인들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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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코 고이티아의 <쓰레기터의 노인> - 황량한 쓰레기장과 파란 하늘의 극명한 대비가 노인을 더욱 쓸쓸해 보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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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고 리베라의 <종교의 역사> 시리즈 - 아즈텍 문명의 종교과 기독교를 묘사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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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정치적 성향을 띠는 것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함께 있겠지만, 라틴 아메리카의 예술가라면 필연적으로 정치적으로 될 수 밖에 없는 무거운 현실과 역사를 부정하기 힘들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몰라도 특별히 정치적인 제목을 달지 않은 정물화나 풍경화에도 왠지 그들의 비애와 우울이 깃들어 있는 느낌이 들었다. 또한, 바나나를 소재로 한 작품이 유난히 많은 이유는 플랜테이션 농업의 저임금 노동착취에 대한 비판의 시각이 아닌가 싶다.

훌륭한 전통과 문화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에 의해서 "미개척"과 "저개발"이라고 명명되어 서유럽과 미국의 영향 하에서 피정복과 수탈의 상처를 뼈아프게 경험해야 했던 라틴 아메리카. 최근까지도 신자유주의의 폐해와 내전의 아픔, 독재와 학살의 고통을 끊임없이 겪어온 슬픈 대륙이기 때문일까. 미술이든 영화든 어떤 예술 분야를 보더라도 역사적 트라우마가 새겨져 있는 듯한 느낌이 들게 된다. 어두운 현실 속에서 빈민들의 피폐한 삶을 그리고, 용기있게 선동정치가를 풍자하는 그림을 그리고, 거대한 벽화로 민중의 아픔을 그려내는 이들 화가들이야말로 이 세상에 진정으로 필요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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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이층 한쪽에 놓여진 라틴 아메리카 영화제 (아트하우스 모모) 배너와 리플렛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이 많아서 기분이 좋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