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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PIFF 2008] 뒤늦게 정리하는 제13회 부산국제영화제

솔직히 말하자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는 본 영화로만 말하자면 썩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건 순전히 프레스배지 때문이다(영화가 별로였던 것은 아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일반관객의 입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들을 고르고 시간표를 짜고 열심히 예매를 해서 영화제를 갔기 때문에 그만큼의 기대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올해는 프레스배지를 받아 그날그날 스케줄을 짜서 영화를 보다보니 기대감이 덜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영화를 보는 것보다는 여러 기자회견과 행사들을 다닌 기억이 더 오래 남는다. 그럼에도 영화제의 하이라이트는 영화다. 개막작을 뺀 나머지 14편의 영화들을 정리한다.


미리 만나본 한국영화들

똥파리


올해 부산에서 본 영화 중 최고의 영화는 바로 <똥파리>다. 감독과 주연을 맡은 양익준은 독립영화계에서는 거의 스타급(?)의 지명도를 갖고 있는 배우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영화 상영 뒤 GV시간 관객들의 반응도 뜨거웠다. 영화는 시종일관 폭력으로 가득 차있다. 숨 쉴 틈이 없는 폭력의 향연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스크린을 두 눈으로 보기가 힘들 정도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는 오히려 그런 감정을 통해 관객의 시선을 모은다. 폭력 이면에 숨겨진 연약한 인간의 모습들이 인물들에게 묘한 연민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 영화 가득 느껴지는 언제라도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의 힘이 대단한 영화다. 앞으로도 어떤 반응을 모을지 앞날이 기대된다.

지구에서 사는 법


안슬기 감독의 <지구에서 사는 법>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20대 청춘, 그중에서도 대학에 들어가지 않은 젊은이들의 현실을 담백하게 담아낸 <나의 노래는>에 비하면 조금 산만한 느낌이었다. 권태에 빠진 부부의 이야기를 스파이와 외계인과 같은 독특한 소재로 풀어내 통속적이면서 동시에 독특함이 묻어나는 영화였다. 하지만 그 두 가지 상반되는 요소가 잘 영화 속에서 잘 녹아들지 못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보고 싶다. 아무래도 한번 보고 섣불리 판단을 할 영화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다. 여담으로 <궤도>에 출연했던 장소연을 만날 수 있어서 반가웠다.

샘터분식 - 그들도 우리처럼


<필승 Ver 2.0 연영석>을 연출했던 태준식 감독의 신작 <샘터분식 - 그들도 우리처럼>은 제목에서 예상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의 다큐멘터리였다. 영화는 샘터분식 주인아주머니와 마포구에서 활동 중인 지역 운동가, 그리고 음반을 준비 중인 랩퍼의 이야기로 이뤄져 있다. 감독 스스로도 편하게 쉬어가는 느낌으로 촬영했다고 말했듯이 영화는 특별한 메시지보다는 세 사람의 일상에 초점을 둔, 개인적인 일기에 가까운 영화였다. 분식점의 소소한 이야기를 기대한 나로서는 조금 아쉬움이 남는 영화였지만, 각자 나름대로의 목표를 향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는 세 사람의 일상을 통해 약간의 휴식과 위로를 얻은 것도 사실이었다. 영화 전반에 흐르는 세련된 힙합 음악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고기도시


단편영화 중에서는 ‘한국단편경쟁 1’ 섹션의 네 편을 봤다. 광우병을 비롯한 정치적인 맥락을 독특한 발상으로 풀어낸 <고기도시>, 아들의 여자친구의 낙태 수술을 따라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시종일관 흔들리는 핸드헬드가 머리를 어지럽게 한 <아들의 여자>, 현실적인 분위기 속에 담긴 판타지가 인상적인 <하이브리드>, 사춘기 소녀들의 예민한 감성을 영화적으로 잘 포착해낸 <봄에 피어나다>가 그들이었다. 개인적으로는 <하이브리드>와 <봄에 피어나다>가 좋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아들의 여자>가 선재상을 받았다.


새로운 재능을 발견하는 뉴 커런츠 부문 상영작들

허수아비들의 땅


<허수아비들의 땅>은 <마지막 밥상>을 연출한 노경태 감독의 두 번째 장편영화다. 필리핀에서 입양되어온 한 청년과, 남자가 되고 싶은 트랜스젠더, 결혼을 위해 한국에 온 필리핀 여성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오히려 아무런 의미가 없다. <허수아비들의 땅>은 내러티브보다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충돌’적인 감정으로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다. 환경파괴로 비롯된, 이 세상의 온갖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바로 그 메시지다. 솔직히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에는 충분히 공감하면서도, 그것을 이토록 낯선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영화의 태도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올해 뉴 커런츠 상을 받았다. 아무래도 실험영화는 내 스타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오히려 더 인상적인 한국영화는 김태곤 감독의 <독>으로 영화 곳곳에 보이는 대중적인 가능성이 돋보였다. 독립영화를 중심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배우 양은용이 주연을 맡은 영화로,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를 온 한 가족이 이웃에 사는 기독교 신자들을 만나며 겪게 되는 미스터리한 일을 그리고 있다. 가족들의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가족들의 숨겨진 이야기가 드러나면서 점점 공포스런 분위기를 자아낸다는 점이 어쩐지 <소름>을 떠올리게 했다(물론 <소름>의 놀라운 완성도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지만 말이다). 시각적인 공포에 치중하지 않으면서 감정적으로 공포를 만들어가는 연출력이 돋보였는데, 만약 좀 더 많은 돈을 들였더라면 정말 무섭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본다. <똥파리>와 함께 계속해서 응원을 보내고 싶은 영화다.

잘라이누르


중국 독립영화의 수작이라고 소개된 자오예 감독의 <잘라이누르>는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영상이 매혹적인 영화였다. 영화는 내몽골 지역의 탄광도시를 배경으로 그곳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증기기관차 운전사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익스트림 롱 쇼트로 잡아낸 마을의 풍경은 황량함과 동시에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어서 묘한 느낌이었다. 특히 보랏빛에 가까운 하늘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하지만 아름다운 영상과 달리 이야기는 쓸쓸함이 느껴졌다. 그런 감정적인 충돌이 마음에 더 큰 인상을 새겨 넣었다.

날고 싶은 눈 먼 돼지


인도네시아 출신 에드윈 감독의 장편데뷔작 <날고 싶은 눈먼 돼지>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중국인에 대한 차별을 영화적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폭죽을 먹는 소녀, 한때 배드민턴 선수였던 그녀의 어머니, 중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아버지, 그리고 중국인만 아니면 뭐든지 되고 싶어 하는 소녀의 남자친구 네 명을 중심으로 진행되는 영화로, 시간적인 순서와는 상관없이 진행되고 있다. 비디오룸에서 보느라 영화의 매력을 제대로 느낄 수 없어서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다.


감독의 이름만으로도 보고 싶었던 영화들

걸어도 걸어도


무엇보다도 이번 부산국제영화제를 기대하게 했던 것은 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 에릭 쿠 감독의 신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전작 <하나>는 조금 실망스러웠다. 예리하게 일상을 포착하는 그의 연출을 좋아한 내게 시대극 <하나>는 어쩐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의 신작 <걸어도 걸어도>는 <하나>의 실망감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영화였다. 영화는 노부부의 집을 아들과 딸의 가족이 1년 만에 찾아가게 되면서 겪게 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그들에겐 죽은 첫째 아들이 있다. 어머니는 자꾸만 죽은 아들의 기억을 떠올리고, 아버지는 소원한 둘째 아들 때문에 자꾸만 서먹서먹한 행동들을 한다. 노부부의 집으로 이사를 오려는 딸은 그럼에도 부모와는 독립된 생활공간을 차지하려고 하고, 부모를 만나고 싶지 않았던 아들 역시 자꾸만 삐딱한 행동들을 하게 된다. 아베 히로시가 아들 료타 역을, <아무도 모른다>의 무정한 엄마로 등장했던 유가 딸 치나미 역을 맡았다. <걸어도 걸어도>는 단지 하루 동안의 일상을 담담한 시각으로 담아내고 있을 뿐인데도, 그 일상이 전해주는 마음의 울림이 엄청난 영화다. 또한 3년 전 어머니를 떠나보낸 감독의 자전적인 경험이 반영되어 있는 영화라 몇몇 신은 정말 가슴이 찡할 정도다. <원더풀 라이프>와 <아무도 모른다>에 이어 내 인생의 영화 목록에 추가할 영화다. 하루 빨리 극장을 통해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에릭 쿠 감독의 <마이 매직>은 전작 <내 곁에 있어줘>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는 이번 칸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됐는데 안 좋은 반응을 더 많이 받았다. 그것은 순전히 <내 곁에 있어줘> 때문이다. <마이 매직>은 분명 못 만든 영화는 아니지만 <내 곁에 있어줘>를 뛰어넘는 영화는 아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 <내 곁에 있어줘>가 정말 훌륭한 작품임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마이 매직>이 아쉽게 느껴졌다면 그것은 <내 에 있어줘>에 비해 내러티브가 단순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상한대로 진행되는 영화이기에 엔딩이 전해주는 가슴 뭉클한 감동도 <내 곁에 있어줘>에 비해 약한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마이 매직>이 쉽게 잊히지 않는 것은 주인공인 거대한 체구의 마술사 때문이다. 아들을 위해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면서까지 마술을 하는 그의 모습은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는 곳에 이른 비참한 삶의 단면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여전히 에릭 쿠 감독은 영화로 희망을 얘기한다. 다만 이번엔 그것이 좀 더 극단적으로 그려졌을 뿐이다.

해피 플라이트


나는 우울할 때마다 <워터보이즈>를 본다. 이 영화만큼 유쾌한 영화는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영화를 통해 기분 좋은 웃음을 선사하기 때문에 야구치 시노부 감독을 좋아한다. 그의 신작 <해피 플라이트> 역시 영화 보는 내내 웃음을 참을 수 없는 작품이다. 게다가 이번엔 비행기와 공항을 중심으로 다양한 인물들이 펼쳐내는 웃음의 앙상블을 선사한다. 마치 <웰컴 투 미스터 맥도날드>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자세하게 묘사된 공항과 항공기 안의 모습들은 영화에 현실감을 부여하면서 더욱 큰 웃음을 만들어낸다. 생각만 해도 웃음이 절로 나오는 영화, 진정한 행복을 경험할 수 있는 영화다.

동사서독 리덕스


아쉽게도 <동사서독 리덕스>는 원작의 기억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예전에 원작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복잡함보다 좀 더 간결해진 느낌이라 이야기를 따라가기 쉬웠다. 영화 중간마다 자막으로 절기 이름을 삽입, 순환구조를 확실히 한 것이 가장 큰 변화였고, 얘기를 들어보니 몇몇 신들이 삭제 혹은 추가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동사서독 리덕스>는 무협영화의 틀을 빌려 ‘사랑’이라는 왕가위 감독의 변함없는 주제를 이야기하는 영화였다. 개인적으로는 <중경삼림>을 왕가위 영화 중 제일 좋아하는데, <동사서독 리덕스>를 다시 보면 왠지 그 순위가 바뀌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남은 두 편의 영화

타한 - 수류탄을 쥔 소년


산토시 시반 감독의 <타한 - 수류탄을 쥔 소년>은 예기치 않게 몰려온 피곤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했다. 많이 아쉽다. 그래도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쉬지 않고 이어지는 긴장감은 쉽게 잊기 어려울 것 같다. 인도영화는 발리우드처럼 뮤지컬만 있을 거라 생각했던 편견을 깨트린 작품이다.

오'호텐


마지막 영화는 노르웨이의 벤트 하머 감독이 연출한 <오’호텐>이다. 벤트 하머 감독의 전작인 <삶의 가장자리>는 4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적이 있는데, 변변치 않은 낙오자 인생을 살아가는 소설가 맷 딜런의 연기가 오래 기억에 남았던 영화다(사실 그것만 기억에 남았고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호텐>은 정년퇴직을 눈앞에 둔 기관사의 이야기로 영화 곳곳에 냉소적인 유머가 녹아있는 작품이다. 유머러스하지만, 한편으로는 늙음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진중함도 담겨져 있다. 예상하지 못한 일들을 겪는 주인공의 모습이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한편으론 주인공 얼굴의 주름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크기가 보는 이로 하여금 동정심을 갖게 한다. 늙어간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 느껴지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