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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s> 고마워요, 켄 로치


<Kes> 고마워요, 켄 로치
UK;1969;112min;35mm;color
Director: Ken Loach
Casting: David Bradley, Colin Welland

<자유로운 세계>를 보고 켄 로치의 초기작들이 궁금해졌다. 하긴 늘 그의 영화를 볼 때마다 초기작품이 어떨지 궁금하긴 했다. 이 이름값 좀 한다는 감독이 어쩌다 이 경지에 이르게 됐는지... 그 변화와 지속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 사실 영화가 궁금했다기 보다 그의 젊은 시절을 훔쳐보고 싶었다. 지금 갈 길 모르고 헤매는 나에게도 메시지를 툭 하고 던져줄 것 같은 기대로. 자료를 뒤지다 TV 시리즈를 빼고 1967년 <불쌍한 암소 poor cow>부터 지금까지 20편 남짓한 작품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거의 2년 마다 한 편씩 꾸준한 작품 활동을 했는데, 노년에 들어서도 게으름 피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습에 애정을 더하게 된다. 필모그래피 중에서 내 눈에 들어온 영화는 그의 두 번째 작품 1969년 <케스 Kes>. 베리 하인즈의 소설 <매와 소년>을 스크린으로 옮긴 이 영화는 켄 로치를 영화감독으로서 재능을 알린 계기가 됐다고 한다. (베리 하인즈는 이 영화의 각본을 직접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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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배경은 1969년 영국 요크셔의 어느 탄광 마을. 주인공 빌리는 평일에는 일 하기 바쁜 엄마, 그리고 배다른 형과 함께 살고 있는 15세 소년이다. 또래들에 비해 키가 작고 볼품 없이 깡마른 빌리는 이미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사는 법을 익혀가고 있는 중이다. 배움에는 별로 큰 관심이 없다. 친구들에게도 그다지 애정이 가지 않는다. 오직 신문을 돌리며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그 친구에게는 버거운 삶의 십자가다. 그런 그에게 관심거리가 생긴다. 낡은 성당의 처마 밑에 살고 있는 황조롱이 가족(매)이 주인공. 자유롭게 그리고 날카롭게 비행과 사냥을 하는 매의 모습에 매료된 빌리는 어미가 빠져 나간 둥지에서 몰래 꺼내온 새끼 매와 친구가 되기로 한다. 그 녀석에게 <Kes>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빌리는 케스가 죽지 않고 적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 녀석이 굶지 않도록, 날 수 있도록. 어디 한 군데 마음 붙일 곳이 없었던 빌리에게 케스는 친구이자, 가족이자, 선생님이자, 꿈이 된다.

<Kes>는 지금 켄 로치의 영화들보다 훨씬 문학적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글로 옮긴 소설보다도 능수능란하게 화면에서 이야기를 다룬다. 지금까지 그의 영화가 '재미있다'고 평가받는 이유는 아마도 메시지를 담고 있는 기본적인 스토리라인이 흥미롭고, 그것을 스크린에서 전개시키는 영화적 구성이 매력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이미 초기작에서부터 이런 재능은 뚜렷하게 드러난다. 오히려 지금은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에 가려 그의 섬세한 문학적 코드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안타깝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30대 초반에 그가 만든 케스는 성장 영화라는 장르 속에서 그의 문학적 감수성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고마운 영화다. 마치 재미있는 소설 한 편을 대하는 기분으로 문맥에 감정을 이입하며 때로는 안타깝게, 때로는 따뜻하게 즐길 수 있다. 때문에 영화를 보면서 어느 덧 빌리와 함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빌리가 케스를 만나 성장하는 과정은 곧 우리가 성장했던 모습이다. 또한 빌리를 둘러싼 학교와 가정, 사회 속에서 그가 경험하는 목마름은 분명 누구나 한 번쯤은 느꼈을 감정들이고, 피와 살이 답하는 경험들이다. 그의 이야기가 영국의 탄광마을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을 갖게 되는 이유다. <가족의 탄생>의 김태용 감독이 <케스>에 대해 "자신의 유년시절의 기억을 바친다."라고 표현한 것이 우연은 아니다. 시스템의 안에 포함되지 못하고 겉돌면서도 뚜렷하게 반항이나 저항을 하지는 않는 그저 그런대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소년들은 우리의 과거이자, 현재이자, 또한 미래가 된다. 어디든 지금의 사회와 학교는 제 기능을 잃어버린지 오래고, 가정 역시 이들을 따뜻하게 품기에는 버겁기 그지 없다. 오히려 빌리처럼 우리 역시 애초에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에 기대 같은 것은 하지 않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극중에서 학교는 직업인을 배출하는 곳일 뿐 그 외의 것에는 관심이 없다. 선생님은 학생들이 무엇을 원하고 요구하지는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좋은 직업적 소양을 갖춘 노동자로서 "찍어 내기"만 하면 된다. 묻지도 않고 매질부터 퍼붓는 폭력적인 교장선생님, 그리고 축구 경기 진 것이 억울해 공연히 아이들에게 화풀이를 하는 어이 없는 담임 선생님까지. 이들은 불쾌하고 어이없다 못해 실소까지 나오게 만든다. 가정 역시 다르지 않다. 탄광마을이라는 공간적 특성 때문인지 빌리의 엄마와 형은 모두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가는 고된 노동자들이다. 이들이 기댈 곳은 주말 저녁 바에 앉아 친구와 맥주 한 잔을 마시거나, 경마에 돈을 걸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전부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학교를 통해 끊임없이 대량생산되고 있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이미 의미를 잃어버린 단어고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건너 뛰어 지금 이 공간에서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어느 누구도 빌리에게 정말 원하는 것을 묻지 않는다. 직업교육 선생님은 빌리를 포함한 졸업을 앞둔 아이들에게 기능직과 사무직 두 개의 답안지를 내밀고 미래를 결정지으라고 다그친다. 책상 앞에 마주한 학생이 진정 되고 싶은 것은 고려 사항이 아니다. "졸업하면 무엇이든 하면서 돌은 벌겠죠. 뭘 하든 상관 없어요." 라고 말하는 빌리 역시 자신의 미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빌리는 제도와 기관이 가르쳐 주지 않는 인간관계와 삶의 철학을 그의 유일한 친구인 케스를 통해서 배운다. 빌리에게 케스는 친구이자 희망이다. 자유롭고 매섭게 주위를 정적으로 만드는 케스에게서 존경심까지 느낀다. 그래서 빌리는 사람들이 케스를 애완매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케스는 애완용으로 길들여지는 것이 아닌 맹수로서의 본성과 야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빌리와 함께 훈련될 뿐이다. 매에게 길들여진다는 것은 곧 죽음과도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에게도 다르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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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와 케스가 훈련하는 곳에 찾아온 선생님에게 빌리는 케스를 가리키며 "이렇게 옆에서 보게 해주는 것만도 제게 큰 선심을 쓰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케스는 빌리에게 이렇듯 자신이 경외하고 사랑하는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도 길들여지지 않는 자유로운 케스처럼 되고 싶은 희망. 하지만 영화는 비극적이다. 경마에 배팅하라고 심부름으로 받은 돈을 케스 먹이 사는데 써버린 빌리에게 화가 난 형 쥬드가 케스를 더 이상 날지 못하게 만든 것. 어쩌면 진정한 자유에서 벗어난 케스에게는 정해진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빌리라는 좋은 친구가 있더라다고 새장 안 횃대는 케스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빌리는 형에게 있는 대로 악다구니를 해보지만 죽은 케스는 돌아오지 않는다. 케스를 빌리는 한 동안 끌어안고 그들이 함께 훈련하던 곳 한 켠에 묻어준다. 어쩌면 케스와 함께 빌리의 희망 역시 그를 떠났는지도 모른다.

켄 로치의 두 번째 영화 <Kes>는 아무래도 오랫동안 가장 인상깊은 성장영화 가운데 하나로 남을 듯 하다. 심각하게 우울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무작정 희망을 안겨주는 다른 해피엔딩 식의 성장영화가 아닌 삶의 고됨이 그대로 묻어 나는 빌리의 이야기가 두고두고 떠오를 것 같다. <KES>. 우연히 알았지만 내 이름의 영문 이니셜과 같다. 오늘부터라도 나 역시 죽지 않을 Kes를 품어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