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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미쓰 홍당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들의 생존법

<미쓰 홍당무>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 하는 이들의 생존법

Korea;2008;101min;36mm;Color
Director: 이경미
Casting: 공효진, 황우슬혜, 서우, 이종혁, 방은진

<미쓰 홍당무>를 극장의 포스터에서 처음 알게 됐을 때. "아무리 영화가 중요해도 그렇지 여배우 얼굴을 저렇게 해놓는 게 어딨어! 얼굴로 먹고 사는 사람들인데, 저 영화 찍고 다신 작품 안 할 것도 아니고 제작사가 참 대책이 없군."이라며 틱틱거렸던 기억이 난다. 개인적으로 공효진이라는 배우를 상당히 좋아했었기 때문에 혹 그녀가 다음 영화를 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이 들었다. 대부분의 범상한 남자들은 여배우의 미모 정도를 보고 매표소에서 영화 관람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내가 뭐 어때서?!"라는 헤드카피와 함께 화면 가득 뭔가 상당히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 듯한 공효진(양미숙)의 벌게진 얼굴이 강하게 인상에 남았지만, 두 번 눈이 갈 것 같지는 않았다. "분명 또 못 생기고 능력 없는 여자의 신데렐라 성공 스토리겠지."라며 그저 그런 영화포스터들 속에 또 한 편의 "그저 그런" 영화일 것이라고 주홍글씨를 밖아 버렸다. 그럼에도 공효진에 대한 신뢰와 웃기기는 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영화를 봤다. 그리고 1주일이 지났다. 지금 난 그토록 불만을 쏟아냈던 양미숙의 익스트림 클로즈업 포스터를 컴퓨터 배경화면으로 깔아놓고 매일 쓰다듬, 쓰다듬 하고 있다. "그래 미숙씨, 우리 같은 사람은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해요." 그리고 엄청난 데뷔작으로 지리하던 충무로를 다시 한 번 시끄럽게 만든 73년생 여감독에게도 관객으로서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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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쓰 홍당무> 정확히 '양미숙'의 등장은 가난하고 목마르기만 하던 한국영화계에 내리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단비같은 존재다. 언제부턴가 몇몇의 거장 감독을 제외하고는 그저 그런 스타 배우의 이미지에 목맨 영화만을 쏟아내던 충무로였다. 스크린쿼터가 한미 FTA 협상과 연결되면서 한국영화 상영일수가 줄었고, 제작 편수가 줄어들면서 상황은 더욱 악순환이었다. 대내외적으로 한국영화의 호시절이 끝났다는 우려섞인 목소리도 나온 것도 사실이다. <미쓰 홍당무>는 암울한 환경 속에서도 한국영화계가 끈질기게 "돌아가고" 있고, 재능과 역량을 갖춘 인재들이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다는 사실을 보란듯이 증명한 작품이다. 그리고 관객에게도 다시 한 번 한국영화에 대한 믿음을 선물해 준 영화다. 과연 박찬욱, 봉준호 등 지금 충무로를 이끌어가는 스타 감독들의 전폭적인 지지가 마케팅 수단이나 관객몰이용 홍보는 아니었던 것이 확실하다.

도대체 왜? <미쓰 홍당무가> 받고 있는 사랑와 애정의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를 중심에서 이끌고 있는 '양미숙'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녀는 한국영화에서 신천지와도 같은 캐릭터이다. 계보도를 살펴보면 비슷한 선배 언니들이 없던 것도 아니다. 뭔가 '하자' 있는 여자 캐릭터들의 고군분투 스토리들. <플란다스의 개>의 배두나가 있었고,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임수정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영화적으로 매력적인 캐릭터이기는 했지만 뭔가 현실에 활착된 인물들은 아니었다. <올드미스다이어리>의 예지원과 <미녀는 괴로워>의 김아중도 한 쪽에 있다. 나름대로 선전한 언니들이지만 결과적으로 멋진 애인과 사랑하고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신데렐라 스토리 주인공의 이미지가 강하게 느껴진다. 양미숙은 안면홍조증이라는 흔치 않은 병 때문에 태클 많은 인생을 살아간다는 만화적 캐릭터이지만 굉장히 현실에 밀착된 캐릭터다.

<빨강머리 앤>과 <캔디>, <미운오리 새끼> 등 여러 만화들의 한 부분이 복합적으로 연상되는 인물. 이 만화적이고 상식 밖의 인물(양미숙)이 지극히 상식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가 결국 <미쓰 홍당무>이다. 때문에 양미숙이 가지고 있는 삶의 철학은 간단하고 명료하게 정의할 수 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한다." / "1등에 목을 매느니 차라리 목을 매겠다." 자기와 같이 비상식적 인물들이 상식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들보다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두드러지면 안 된다고 철저히 믿고 있는다. 그저 평범하게 살기 위해 죽기살기로 노력을 해야 하는 것, 웬만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사는 것이 최고의 목표인 것이다. 그냥 남들처럼. 조금 자세히 지금 양미숙이 처한 상황을 보면 그녀가 지금까지 나름대로 자기가 생각했던 방향으로 열심히 살아왔다는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9살의 중고등학교의 러시아어 선생님. 여자 선생님이라는 현실에서 나름대로 안정적이라고 인정받는 직업을 갖기 위해 그녀는 사범대를 들어갔을 것이다. 거기서도 상대적으로 경쟁이 낮을 것으로 예상되는 러시아어를 선택해 최대한 안정적인 코스로 선생님이 됐을 것이다. 상당히 지능적이고 현실적인 고려들. 이후에 그녀가 해결해야 하는 숙제는 돈과 남자. 그 둘만 있으면 이제 그녀는 다른 사람들처럼 "빨개지는 일" 없이 평범하게 살 수 있다. 남들 시선에서 해방될 수 있는 필요조건이 모두 완성되는 것이다. 그래서 미숙은 돈이 모일 때까지 학교 교무실에서 지내고, 생전 받아본 적 없는 추파(?)를 던졌던 동료 선생님(이종혁)에게 목을 맨다. 안면홍조증을 고치기 위한 치료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고지가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그녀를 둘러싼 상황은 자꾸 양미숙의 평범한 삶을 계속 방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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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좋아한다고 믿는 남자는 이미 유부남이고, 설상가상으로 자신이 지금까지 그 남자가 자신과 같이 러시아어를 가르치는 미녀 선생님과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름까지도 예쁜 사람이다, 이유리. 인기 없는 러시아어 때문에 학원을 다니면서 영어를 가르치게 만드는 상황도 그녀에게는 엄청난 태클이다. 그래도 현실에 적응하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간으로서 소화할 수 없는 스케줄을 소화하며 살지만 늘 상황은 그녀에게 호의적이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매사 신경질적이고 방어적이다. 뭔가 마음에 차지 않으면 실제로 삽질도 한다. 그럴수록 시선은 그녀를 튀는 존재로 만들어 놓는다. Crush and Blush. 계속 화가 나고 붉어질 수밖에 없다. 때문에 미숙이 억울한 듯 "내가 뭘!" 이라고 소리치며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장면는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미숙의 비애가 고스란히 묻어난다.

미숙에게도 유일한 친구가 나타난다. 사모하는 선생님의 딸 종희. 축제 단체 공연의 리본 분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소심하게 말했다가 왕따로 전락한 주근깨 가득한 소녀. 학교는 개성을 요구하지 않는다. 언제나 조화를 강조할 뿐이다. 튀는 것은 쥐약이다. 때문에 미숙과 종희 같은 사람들이 더욱 조용히 살아야 하는 곳이 바로 학교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많이 웃었던 장면은 미숙과 종희가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고도를 기다리며> 공연 준비를 하면서 종희의 "이거 하면 애들이 놀리지 않을까요?"라고 묻는 질문에 미숙이 "이거 계속하면 수준 높아져."라고 답하는 모습이었다. 이렇듯 이 둘은 항상 자신에게 불만족스럽고, 온전히 자기 자신이었던 적이 없다.) 두 왕따와의 만남은 이유리 선생과 서종혁 선생을 떼어 놓기 위해 전략적으로 이뤄졌다. 결국 상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가운데서 이유리 선생을 중상모략하며 떼어놓기에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의 위기가 있었지만 미숙과 종희는 나이와 성별, 선생님과 제자라는 차이를 넘어서 누구에게서도 받아보지 못했던 위로와 애정을 느낀다. 그리고 친구가 된다. 어른 같은 아이와 아이 같은 어른,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으면서 환상의 짝꿍을 이루는 둘은 학생들이 무대 위로 야유를 날려도 웃을 수 있다. 이제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천천히 배우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자기 스스로를 다잡는 방법, 결국 미숙을 빨갛게 만드는 것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으니까.

영화의 매력은 양미숙과 그녀의 고군분투 이야기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방은진과 이종혁을 더불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서우와 황우승혜가 연기하는 캐릭터 모두 매력적인 자기 빛을 뚜렷하게 내고 있다. 사실 영화 속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모두 하나씩의 '하자'를 갖고 있는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서종혁 선생은 멋지지만 우유부단함의 극치를 달리고, 그의 부인은 강단 있게 보이긴 하지만 자기 감정을 보이는데 서투른 사람이다. 이유리 선생은 예쁘고 착하지만 지나치게 맹한 구석이 있다. 영화 속에서 가장 중요한 이들이 모두 모이는 학교 어학실 장면은 그래서 총천연색의 캐릭터들이 듣기 좋은 협연을 하는 듯 느껴진다. 영화의 대사 한 마디, 소품 하나 어느 것 하나 귀엽고 사랑스럽지 아니 한 것이 없다. 학교, 댄스학원, 선생님의 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 역시 탁월하다. 두고두고 지켜볼 감독의 탄생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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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에서 3번이나 등장하는 수학여행 단체사진 장면. 이 장면은 미숙이 꿈꾸는 바와 현실에서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평범하기 살기 위해 튀는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미숙. 그녀 역시 누구나처럼 자기 얼굴이 들어있는 수학여행 단체사진 한 장을 갖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숙을 받아주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를 향해 환하게 웃는 미숙의 모습이 기쁘면서도 자꾸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나 역시도 의도하지 않게 누군가에게 많은 상처를 주면서 살았겠지. "미숙씨, 언젠가 미숙씨도 남들처럼 살기 위해 남들보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올거예요. 미숙씨는 따뜻한 사람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