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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 theater

소녀는 울지 않는다.<나는, 인어공주>


울 준비가 되어 있는 소녀다.

아빠는 없고 엄마는 목하 남자와 열애중이다. 지속적으로.
그게 뭐 나쁜 건 아니지만.

집은 바람에 날아갔고, 학교에서는 왕따다.
그것도 꼭 죽을 만큼 힘든 일은 아니지만.

빼빼마른 몸에 주근깨는 가득이고 언뜻 보면 ‘노안’이기 까지 하다. 현대 사회에서 이것은 슬픈 일이다. 17세 소녀가 ‘할매상’이라니... 얼굴이 ‘노안’이라서 그런건 꼭 아니지만 어쨌거나 살아보겠다고 맥주병 같은 인형 옷을 뒤집어 쓰고 하루 종일 거리를 걷는 알바를 했더니 악덕 고용업자는 땡전 한 푼을 주지 않는다. 초록머리 노안의 불행한 소녀 알리사는 결코 쉽게 울지 않는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다. 세상은 그녀에게 한 번도 쉽지 않았고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데르센의 덴마크나, 디즈니의 헐리우드가 아닌 러시아에서 두 발로 탄생한 ‘인어공주’ 알리사는 영화 <나는, 인어공주>를 매력적으로 만드는데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히로인이자, 동화와 영화의 세계를 누구보다 큰 걸음으로 내달리는 하이-브리드한 캐릭터이다.

다소 거친 호흡의 장면들과 지루하진 않지만 가끔 생뚱맞은 극의 전개를 매끄럽게 연결 시키는 건 바로 ‘노동하고 사랑하고 구원하는 십대 여성’이다. 일반적인 대중영화에서는 매우 드문 일이지만 <나는, 인어공주>는 십대 여성이 완벽하게 원 톱을 이루는 영화다. 그녀는 차가운 현실과 또 그만큼 차가운 사랑에 내던져지거나 내몰리지언정 결코 울지 않는다. 삶을 위해 일하고 사랑을 위해 염색하며 성취를 위해 담배를 피워 물 뿐이다. 아마 이토록 능동적인 여성 캐릭터가 또 있었을까 생각할 정도로 ‘알리사’는 건강하게 매력적이다.


<나는, 인어공주>는 비전형적인 캐릭터 무비이다. 안데르센의 가장 슬픈 동화 <인어공주>의 꼭지점들을 즈려 밟으며 21세기형 동화의 새로운 변형을 흥미롭게 제시한다. 동화의 설정들을 마치 ‘미션’처럼 수행하지만 그 과정은 대체로 어드벤쳐 영화를 보듯 흥미진진하다. ‘목소리를 잃고 사랑에 빠져 죽음에 이르는 비극‘은, 문장을 음독할때와는 다른, 매우 진보적인 영상의 뉘앙스를 통해 매혹적인 태를 갖는다. 즉 동화의 인물은 현실적인 꼴을 갖추고 그 인물을 수용하는 현실은 판타지의 자장 어딘가에 스리슬쩍놓아두는 이 영화는 시작하지 마자 자신만의 영상 전파 방식으로 내달린다.


이런 영화의 흐름을 잘 뒷받침하는 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매혹적인 영상의 힘이다. 러시아의 어촌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전반부에서는 산토리니의 낭만과는 또 다른 어촌의 싱싱한 펄떡거림이 화면 안에 그대로 펼쳐지고 모스크바라는 대도시의 조각들은 파편처럼 쪼개지고 큍트처럼 맞춰진다.

특히 극의 흐름과 메시지에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도시의 광고판들을 훑는 카메라는 빠르고 경쾌한 동시에 리듬감과 관점을 잃지 않는 영민한 ‘워킹’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관객들의 뇌리 속에 깊이 기억될 장면들은 알리사의 ‘환상 혹은 망상’장면들이다.

보랏빛 모래사장과 옥빛깔의 수평선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었거나 스쳐가듯 등장했던 인물들과 소품들이 말 그대로 4차원처럼 펼쳐진다. 마치 무척이나 지루했지만 충격적인 영상미로 아직도 부분 부분 비수처럼 기억되는 트란 안 홍의 <씨클로>를 떠올리게 하는 장면의 구성이요, 쉽게 보지 못했던 영상 미학의 성취이다. 씩씩하고 천진난만한 소녀의 애정만세가 꿈처럼 그려지는 이런 장면들은 성취할 수 없는 감정의 소요를 뭉클하게 펼쳐낸다.


아름답지 않지만 건강한 소녀는, 혹은 특이하고 이상한 인어공주는 원하지 않는 사랑에 빠져 한 사람을 원하게 된다. 사랑이라는 원형의 비극이 늘 그러하듯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이 아픈 이 비극은 공주에게 쉽사리 왕자님을 허락하지 않는다. 백마 탄 왕자는 타고 난 부를 뺏긴 대신, 불규칙한 현대 생활의 리듬과 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팔 뻔뻔함을 얻었다. 게다가 이 ‘나쁜 남자’는 소녀의 심장을 훔치는 동시에 감히 소녀에게 연적일 수 밖에 없는 여인의 육체를 탐하고 있으니 소녀는 울지 않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쓸 수 밖에 없다.

이 영화 속에서 빠지고 구하는 것이 여인들의 역할이라면 엄마는 바다에 빠져 아빠를 유혹했고 알리사는 강물에 빠져 사랑을 건져냈다. 그러나 그들이 끝내 외로운 것은 사실 그들 자신 때문이기보다는 왕자님이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실체의 불완전성 때문이다.

달을 파는 날라리는 비록 잠깐씩, 기면증처럼 소년 같이 순수해지더라도 이미 현실을 버리기로 마음먹은 철지난 왕자님 일뿐이다.

그녀의 구원은 결국 예정된 비극을 엇박자로 변주하며 칼날같이 예리한 충격을 준다.

소녀는 울지 않고 새된 비명도 없이 그저 사랑을 지키거나 혹은 누군가의 가슴에 쿡 하니 박아 놓는 이별을 택한다.


혹자들은 이 영화를 익숙한 동구권의 비극을 다룬 이제는 지루한 텍스트라 하지만

사실 성장 드라마와 여성 캐릭터 드라마의 선명한 자욱 위로 동화책의 낱장과 멜러 드라마의 한 움큼의 호흡을 새겨 넣은 이 영화는 사랑 때문에 울지 않을 소녀들을 위한 아름답고 처절한 연가에 가깝다. 그래서인가싶다.

토드 솔론즈의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가 <아멜리에>보다 더 이 영화의 닮은 꼴로 느껴지는 이유는.